노신사의 낡은 중절모 " 나의 하루 " (1~3화) - (1화) 머리 위의 산책자, 세상을 관망하다

안녕하세요? 독거놀인입니다.

노신사의 낡은 중절모 " 나의 하루 " (1~3화)

(1화) 머리 위의 산책자, 세상을 관망하다



"요즘 것들 모자는 예의도, 멋도 모르는구먼!" 반세기 훈장님 중절모의 속 터지는 아침 산책길


깜박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어둠 저편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들며 옷장 문이 열렸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 이 장엄한 개문(開門)과 함께 시작된다. 먼지 쌓인 어둠 속에서 나는, 나와 함께 수감된 다른 '머리 덮개'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훑어본다. 저기 구석에 처박힌, 챙이 다 구겨진 여름용 '파나마모자' 녀석은 작년 여름휴가 이후로 완전 찬밥 신세고, 그 옆에 납작해진 '베레모'는 주인 어르신이 화가 시절을 추억할 때나 한번 써주시는 비운의 예술가다. 그리고 저…,

오, 맙소사. 며느님이 사다 놓은 저 흉물, 정수리에 털실 뭉치를 달고 있는 '방울 비니'라니! 저런 건 머리에 쓰는 게 아니라 뜨개질하다 남은 실 쪼가리일 뿐이다.

그 천박한 무리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감은 단연 독보적이다. 나는 이 가문의 영광과 주인의 품격을 상징하는 '펠트 신사' 아닌가. 이윽고 주인의 따스하고 주름진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역시, 오늘도 선택은 나다. 

주인은 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부드러운 솔로 결을 따라 쓱쓱, 먼지를 털어주신다. 크하! 이 맛이다. 마치 대업을 앞둔 장수가 투구를 닦는 의식과도 같은 이 경건한 순간이 지나면, 드디어 나는 나의 옥좌, 주인의 머리 위로 안착하게 된다.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상 최고의 전망대, 나의 하루 임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자 싸늘한 아침 공기가 나의 둥근 정수리를 감쌌다. 기분 좋은 쌀쌀함이다. 주인과 나는 한 몸처럼 익숙한 보폭으로 공원을 향해 걷는다. 나는 머리 위에서 세상을 관망한다. 요즘 세상은 참으로 해괴하다. 저기, 머리에 착 달라붙어 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저속한 '비니'들 좀 보게. 저것들은 머리를 보호하는 건지, 아니면 '나 머리 안 감았소' 광고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저쪽엔 더 가관이다. 시야를 반쯤 가린 채 앞만 보고 돌진하는 무례한 '야구모자'들. 녀석들은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볼 생각이 없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인가? 쯧쯧, 불쌍한 것들. 모자란 주인의 머리를 가리는 게 아니라, 주인의 품격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침표이자 느낌표가 되어야 하는 법이거늘! 

모자 세계에도 도(道)가 있고 격(格)이 있는 법인데, 저들은 그걸 모른다. 아니,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기보단 유영(游泳)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에 쥔 '스마트폰'이라는 망망대해에 영혼까지 잠겨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귀에는 어김없이 '에어팟'이라나 뭐라나!  꽂혀 있었다. 저 물건은 대체 무슨 요물일까?  

뇌에 직접 신호를 보내 조종이라도 하는 것인지, 저것만 끼웠다 하면 세상과 담을 쌓고 저만의 세상으로 들어가 버린다.


"조심하게."

주인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며 길가로 살짝 비켜섰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빠진 젊은 영혼 하나가 결국 주인의 어깨를 '툭' 치고 말았다. 나는 주인의 머리 위에서 살짝 흔들리며 균형을 잡았다. 하마터면 땅바닥에 떨어져 내 고귀한 펠트가 더럽혀질 뻔하지 않았는가!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이 무례한 녀석! 네놈의 눈은 장식이냐! 앞을 봐야 할 눈으로 어찌 손바닥만 한 기계만 들여다본단 말이냐!'

젊은이는 그러나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귓구멍에 에어팟인지를 빼는 시늉도 없이,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로 "죄송" 한마디를 툭 뱉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사과를 하려면 눈을 봐야지!

 자네의 그 사과는 허공을 떠도는 먼지에게 한 것인가, 아니면 자네 귓구멍을 막고 있는 저 에어팟인지에게 한 것인가! 

내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내가 만약 입이 있었다면 당장 뛰어내려 녀석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신사의 예법'에 대해 한 시간은 족히 논했을 것이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고 다시 걸음을 옮기셨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이셨지만, 나는 안다. 주인의 머리가 아주 미세하게, 씁쓸함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한평생 꼿꼿하게 지켜온 주인의 품격에 작은 생채기가 난 것만 같아 내 마음이 다 아려왔다.

세상은 변했다. 너무 빠르고, 너무 무례하게. 나와 나의 주인은 마치 강물 위를 떠가는 낡고 작은 조각배 같다. 쌩쌩 지나가는 모터보트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그저 우리의 속도로 묵묵히 흘러갈 뿐. 그래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진짜 '멋'이다. 

세상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음으로 세상의 풍경을 음미하는 것.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한다. 저 '스마트폰'과 '에어팟'인지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나와 나의 주인은 오늘 오후엔 또 어떤 소란과 마주하게 될까? 부디, 품격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를.


나의 생각!
혹시 여러분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걷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세상이라는 가장 거대하고 생생한 극장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상영 중입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세요. 스쳐 가는 바람에서, 낯선 이의 눈인사에서, 낡은 중절모의 그림자에서 여러분이 놓치고 있던 삶의 진짜 멋과 위트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품격은 여러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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