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5화) 흙으로 돌아가는 길 (The Return to Earth)
"우리가 사라진다고 끝이 아니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종량제 봉투 안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온갖 종류의 낙엽들, 그리고 이름 모를 쓰레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좁은 공간은 습기로 가득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젠장, 여기 정말 지독하군. 내가 이딴 곳에 갇힐 줄이야." '갈잎'은 여전히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젠 분노보다는 체념이 더 깊게 배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소각장일까? 아니면 매립지?" '은행잎'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평소 시니컬한 태도도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은행잎'의 잎사귀를 더듬어 잡았다. 봉투 밖의 세상은 빛과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이곳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난...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난 가장 붉은 단풍잎이었는데..." 내 목소리는 떨렸다. 나는 평생 '가장 높은 가지'와 '가장 붉은 빛깔'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낡고 바싹 마른 낙엽일 뿐이었다.
"죽는다고? 누가 죽는다고 했나, 단풍 군."
그때, 봉투 구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고 검은 흙 알갱이였다. '어르신'이라 불리는 그는 봉투 안의 모든 낙엽에게 존경받는 존재였다. 그는 가장 오래된 잎사귀였고, 심지어 이미 절반 이상이 흙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우리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우리는... '돌아가는' 거지." 어르신이 말했다. "돌아간다고요? 어디로요?" 내가 물었다.
"우리가 시작된 곳으로. '어머니 나무'의 품으로. 대지의 품으로." 어르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봉투는 어디론가 계속 옮겨지는 듯했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던져졌다. 우리는 그 안에서 점점 더 축축해지고, 눅눅해졌다. 우리의 잎맥은 더욱 흐릿해졌고, 몸은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젠 온몸이 간지러워!" '갈잎'이 투덜거렸다. "그건 '분해'가 시작됐다는 증거야, 친구." '은'이 대꾸했다. "우리 몸속의 영양분들이 다시 대지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거지. 비록 우리는 사라지지만, 우리의 '본질'은 영원히 남는다고."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붉었던 색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칙칙한 색깔로 변해 있었다. 내 잎맥은 끊어졌고, 내 잎사귀는 마치 오래된 종이처럼 바스러졌다.
"이게... 나라고? 이게 내가 바라던 '로열 레드'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절망감이 밀려왔다.
"아니, 이게 자네의 '진정한 모습'이지, 단풍 군." 어르신이 말했다.
"우리는 화려하게 빛났지만, 결국 본질은 '영양분'이었어. 우리 몸속에 담겨 있던 생명의 에너지를 다시 대지로 돌려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자, 우리가 죽는 이유지."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봉투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찢! 찢! 찢!
봉투의 한쪽이 거칠게 찢어지며, 바깥세상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는 봉투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이 아니었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짙은 갈색의 '흙' 위였다.
우리는 매립지에 버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던 '죽음의 공간'이 아니었다. 수많은 낙엽들과 유기물들이 뒤섞여 '생명'을 잉태하는 거대한 자궁과 같았다.
나는 흙 속에 스며들었다. 내 몸은 더욱 빠르게 바스러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웠다.
내가 흙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은행잎'과 '갈잎'도 조용히 내 옆에서 흙으로 변해갔다. 그들의 잎사귀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잘 가, 친구들... 다음에 또 만나자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형태를 잃어가는 나에게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완전히 흙이 되었다. 내 몸속의 모든 영양분은 대지로 돌아갔다. 나는 사라졌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되었다.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영양분이 되었고, 저 위를 지나가는 바람이 되었고, 저 멀리 빛나는 햇살이 되었다.
'로열 레드' 낙엽 '단풍'의 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한 순환의 일부이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장엄한 준비였다.
나의 생각!
우리는 끝을 두려워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죠.하지만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사라질지라도, 우리의 경험, 우리의 사랑, 우리의 존재는 분명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남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합니다.
당신의 마지막은, 어떤 '시작'이 될까요?
에필로그: 그리고, 봄 (And, Spring)
"우리는 사라진 게 아니야.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 자, 이제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겨울은 길고도 혹독했다. 우리가 누웠던 그 자리는 하얀 눈으로 덮였고, 살을 에는 추위가 대지를 얼렸다. 하지만 흙 속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비록 잎사귀는 사라졌지만, 영혼의 온기라 해두자)에 의지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단풍'의 붉은 열정도, '은행잎'의 깐깐한 자존심도, '갈잎'의 투박한 성격도, 흙 속에서는 모두 하나로 섞였다. 우리는 더 이상 개별적인 '잎'이 아니었다. 우리는 거대한 '대지의 스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보게들, 자는가?" 꿈결처럼 '갈잎'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아니, 그것은 내 안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다리고 있네." '은'의 목소리 같기도 한, 흙의 울림이 대답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웅크린 채, 아주 천천히, 아주 깊숙이 대지의 혈관을 타고 어디론가 흘러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아주 긴 미끄럼틀을 타고 '어머니 나무'의 뿌리로 돌아가는 여행 같았다.
어느 날,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천장이 녹기 시작했다. 차가운 눈 녹은 물이 스며들더니, 이내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봄비였다. 지난가을 우리를 시궁창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그 무서운 비가 아니었다. 대지를 깨우는 부드러운 노크 소리였다.
톡. 톡. 일어나세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 그리고 터질 듯한 에너지. 그것은 가을날 가지 끝에서 느꼈던 '추락의 공포'와는 정반대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상승의 욕구'였다.
"가자! 위로!" 우리는 소리쳤다. 아니, 우리였던 '그것'이 소리쳤다. 우리는 있는 힘껏 머리를 들이밀었다. 묵직한 흙덩이를 밀어내고, 어둠을 헤치고, 빛을 향해 나아갔다.
푸욱!
마침내, 머리 위로 환한 세상이 열렸다. 눈이 부셨다. 가을의 그 쓸쓸하고 차가운 햇살이 아니었다. 생명력 넘치는, 따뜻하고 포근한 봄 햇살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붉은 단풍잎이 아니었다. 나는 작고, 여리고, 눈부시게 푸른 '새싹'이었다.
"야! 나 좀 봐! 내가 나왔어!" 옆에서 또 다른 새싹이 톡, 하고 튀어 올랐다. 튼튼해 보이는 줄기가 영락없는 '갈잎'의 후예였다.
"시끄러워, 녀석아. 우아하게 좀 피어날 수 없니?" 그 옆에서 샛노란 빛을 띤 연두색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깐깐한 '은행잎'의 영혼이 깃든 게 분명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몸짓으로). 우리는 죽지 않았다. 우리는 흙이 되었고, 거름이 되었고, 나무의 뿌리가 마시는 양분이 되어, 다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저 높이, 우리가 떠나왔던 '스카이 캐슬', 어머니 나무의 가지들이 보였다. 앙상했던 가지에는 어느새 우리와 닮은 수많은 연두색 잎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이자, 우리의 형제이자,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느냐. 수고했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꾸나."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가을 나를 떨어뜨렸던 그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나를 떨어뜨리는 적이 아니라, 나를 춤추게 하는 파트너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봄바람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고, 비에 젖고, 빗자루에 쓸리고, 캄캄한 봉투 속에 갇혔던 그 모든 기억이, 이 찬란한 봄을 위한 거룩한 준비운동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생명은 끝나지 않는다. 낙엽이 진 자리에 새싹이 돋듯, 우리의 이야기는 흙 속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아름답게.
나의 생각!
우리가 살면서 겪는 '추락'과 '상실', 그리고 '어둠 속의 고립'은 결코 무의미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더 단단하고 깊은 '거름'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지금 혹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계신가요? 아니면 캄캄한 봉투 속에 갇힌 기분이신가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다음 '봄'을 위해 무르익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떨어짐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비상이 시작되는 전주곡이다. 썩어짐을 슬퍼하지 마라. 그것은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당신의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