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5화) 숫자는 거짓말을 한다
"늘 진실만을 말하던 내가... 고장 났다. 그러자 헬스클럽이 뒤집어졌다. 아니, 사실은 그들의 믿음이 뒤집힌 거였다."
나의 유일한 자부심은 '정확성'이었다. 나는 감정도, 편견도 없이 오직 중력의 법칙에 따라 숫자를 고지하는 존재. 나의 디지털 액정은 그 누구에게도 거짓을 고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미사여구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팩트(Fact)만을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의 존재의 이유이자 자부심이었던 그 '정확성'에 금이 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사건은 헬스클럽이 가장 활기를 띠는 '아침의 결심자들'과 '한낮의 집착자들'이 뒤섞이는 피크타임에 벌어졌다. 평소처럼 땀방울 송골송골 맺힌 이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어제 먹은 야식에 대한 후회, 오늘 운동에 대한 비장함, 그리고 희미한 기대감이 교차했다.
첫 번째 주자가 조심스럽게 내 위에 올라섰다. 30대 초반의 직장인, 김 대리다. 그는 어제보다 0.5kg이라도 줄었기를 바라며 숨을 참고 액정을 내려다봤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무게를 측정하려 했다. 그런데...
"뭐야! 내가 120kg이라고? 어제 80이었는데!"
김 대리의 비명 소리가 탈의실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 그리고 어이없음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어제까지 80kg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씨름 선수 급으로 불어나다니!
나는 당황했다. 나의 액정에는 '120.5kg'이라는 터무니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의 옆으로는 'Lo'라는 경고등이 불안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배터리 부족. 나의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나의 '진실'이 '거짓'으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탈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거 고장 났네! 아, 오늘 몸무게 재야 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녀는 매일 아침 '모닝 루틴'처럼 나의 숫자를 확인하고 그날의 운동 강도를 조절하는 분이었다. 나 없이는 그녀의 하루 계획 자체가 불가능한 듯 보였다.
"어쩐지. 어제보다 3kg이나 쪘다 했어. 이게 다 저울 탓이었네!" (사실 그분은 어제보다 1kg 정도 찐 상태였다.) 어떤 이는 고장 난 나를 핑계 삼아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려 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봐요, 아줌마! 제가 고장 나기 전에도 그 1kg은 진짜였다고요!'
"내 근육량... 아니, 내 무게... 내 루틴이 망가졌어!" '한낮의 집착자' 중 한 명인 바디 프로필 준비생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자신의 복근을 움켜쥐었다. 그는 나 없이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완벽'한 상태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나를 마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도구처럼 여겼다.
사람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절망했다. 하루 아침에 삶의 '기준점'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나는 단순한 저울이 아니었다. 그들의 하루를 시작하는 '나침반'이었고, 그들의 노력에 대한 '성적표'였으며, 때로는 스스로를 채찍질할 '이유'를 제공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의 '오류'는 그들의 일상에 심각한 '오류'를 초래했다.
트레이너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능숙하게 나를 뒤집었다. "자, 회원님들! 잠시만요! 배터리가 다 닳았네요!"
척척, 새로운 건전지가 삽입되었다. 나는 다시 '생명'을 얻었다. 나의 액정에는 다시 '0.0kg'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트레이너는 밝게 웃으며 외쳤다. "자, 회원님들! 이제 정상 작동합니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줄을 섰다. 그리고 정상으로 돌아온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평온을 되찾고 락커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찾은 듯한 안도감과, 다시금 삶의 통제권을 되찾은 듯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짧은 소동을 겪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고장 났을 때, 어떤 이는 안도했고 어떤 이는 절망했다. 그들이 집착했던 '숫자'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내 배터리 잔량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이 바로 그들이 맹신했던 '진실'이었다.
그들의 행복과 불행이 닳아가는 건전지 하나에 달려있었다니, 생각할수록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120.5kg'이라는 터무니없는 숫자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매일 보여주는 이 냉정한 숫자들도 완벽한 진실은 아닐지 모른다고.
인간의 몸은 수분 섭취량, 음식물 섭취량, 수면의 질, 심지어 스트레스 지수와 컨디션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무게가 바뀐다. 내가 보여주는 것은 그 찰나의 '순간'일 뿐,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뼈와 근육, 지방의 질량만을 측정할 뿐,
그들의 열정, 노력,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의 무게는 전혀 측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고장 났을 때 혼란스러워했지만, 어쩌면 그때가 유일하게 그들이 '숫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몸이 느끼는 감각, 어제보다 가뿐해진 컨디션, 혹은 땀 흘린 후의 성취감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나는 다시 '0.0kg'을 띄운다. 차가운 바닥에 홀로 놓인 나는, 내일 아침이 되면 또다시 수많은 발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은 변함없이 나에게서 '진실'을 원할 것이고, 나는 변함없이 그들에게 '숫자'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이 숫자 역시, 또 하나의 '거짓말'일 수 있음을. 이 숫자가 전부는 아님을.
진정한 당신의 무게는, 내가 보여줄 수 없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나의 생각!
우리는 종종 '절대적인 기준점'에 갇혀 살아갑니다. 저울의 숫자, 통장의 잔고, 시험 점수, 혹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기준점이 사라지거나 흔들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숫자가 당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는가 하는 '과정'과 '노력'이 당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가치는 뼈와 근육, 지방의 총합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당신이 세상에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파동에 있습니다. 때로는 저울을 벗어나, 당신의 '느낌'을 믿어보세요. 당신은 당신이 재는 숫자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