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둠 속의 대기조: 80kg을 기다리며
캄캄하다. 퀴퀴 하고, 어딘가 습한 곰팡이 냄새와 섞인 가죽 냄새. 이곳은 우리들의 감옥이자 휴게소, 바로 '신발장'이다.
내 옆집 사는 나이키 러닝화 녀석은 벌써 2주째 주인님의 선택을 받지 못해 우울증에 걸려 있다. 녀석, 편하게 살고 싶어 하더니 막상 방치되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안다. 30분 뒤면 저 육중한 현관문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곧이어 거인(Giant)의 손길이 나를 덮칠 것이라는 걸.
나는 김 과장의 '전투화'다. 군대에서 신는 워커가 아니다.
매일 아침 전쟁터 같은 서울 도심으로 출격하는 그를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묵묵히 짓눌려야 하는 갈색 소가죽 구두, 그게 바로 나다.
3년 전, 백화점 쇼윈도에서 조명을 받으며 빛나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빳빳했고,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내 콧잔등(앞코)에는 영광의 상처인 스크래치가 가득하고, 뒤꿈치는 주인의 걸음걸이 습관 탓에 바깥쪽만 비스듬히 닳아 있다. 볼품없다고? 천만에. 이건 훈장이다.
김 과장이 부장에게 깨지고, 거래처에서 굽신거리고, 가족을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뛰어다닌 거리만큼 내 가죽은 늘어났고 또 부드러워졌다.
"으아아..."
현관 밖 거실에서 주인의 앓는 소리가 들린다. 기지개를 켜는 소리다. 올 것이 왔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물론 신발이 숨을 쉬는 건 통기 구멍뿐이지만). 오늘 그의 컨디션은 어떨까? 어제 회식 때문에 몸이 불어 있지는 않을까? 제발 부탁이니 구둣주걱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억지로 뒤꿈치를 구겨 신을 때마다 내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낀단 말이다.
자, 준비하자. 곧 나를 향해 뻗어올 저 두툼하고 따뜻한 발을 맞이할 준비를. 나의 하루는 당신들이 아직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릴 때,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비장하게 시작된다.
(1화) 지옥철, 밟히지 않는 자들의 생존기 (07:30 ~ 09:00)
"당신이 스마트폰을 볼 때, 당신의 발밑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윽! 거긴 안 돼!"
비명은 내 마음속에서만 울렸다.
방금 내 왼쪽 볼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른 건 옆에 선 20대 여성의 뾰족한 스틸레토 힐 굽이었다. 아프다. 가죽이 찢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소리 낼 수 없다.
만약 내가 여기서 "아야!" 하고 소리쳤다간, 지하철 2호선은 엑소시즘 현장이 되고 말 테니까. 우리 주인님, 김 과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슬그머니 발을 뺀다. 주인님, 죄송하지만 발을 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콩나물시루, 아니 '인간 압축기' 안에 들어와 있다고요.
오전 7시 40분, 신도림역. 이곳은 신발들의 무덤이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압력. 김 과장의 체중이 75kg(본인 주장)이라 치자. 여기에 만원 전동차의 압력과 가속도가 더해지면 내 밑창에 가해지는 하중은 거의 소형차 한 대 무게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밑창 고무를 바닥에 밀착시킨다. 미끄러지면 끝이다. 주인님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그 망신살은 오롯이 나의 탓이 된다.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바닥의 풍경이 급변한다. 전투 태세다. 나는 곁눈질로 주변 동료들을 살핀다. 저기 보이는 반짝이는 'G사' 명품 로퍼. 쳇,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됐군. 가죽이 뻣뻣해서 주인의 발뒤꿈치를 다 까놓고 있잖아? 멍청한 녀석, 주인과 호흡을 맞춰야지 자기주장만 하고 있네. 반대편의 낡은 운동화는 거의 실신 직전이다. 끈이 풀려 덜렁거리는 꼴이라니.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만 쳐다본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 바닥에서 얼마나 치열한 영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발 디딜 틈을 찾기 위한 미묘한 신경전, 타인의 발을 밟지 않으려는(혹은 밟고도 모른 척하려는) 고도의 심리전.
김 과장이 휘청한다. 급정거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죽을 수축시켜 그의 발목을 꽉 잡아준다. '정신 차려요, 김 과장! 아직 내릴 때가 아니라고!' 내 노력 덕분일까? 그는 손잡이를 놓쳤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발바닥에서 뜨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벌써 땀이 차기 시작한다. 아, 오늘 하루도 꿉꿉하겠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축축한 땀이야말로 그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흘리는 눈물 같은 것인걸.
드디어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인파에 떠밀려 승강장으로 나간다.
누군가가 내 뒤꿈치를 툭 차고 지나간다. 사과도 없다. 괜찮다. 나는 김 과장의 발을 보호했으니까. 스크래치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내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강인해 보일 뿐. 자, 이제 회사까지 도보 10분. 아스팔트 위를 또각또각, 경쾌하게 걸어보자.
나의 생각!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은 사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버텨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아침, 당신의 발을 감싸준 낡은 신발에게 "고마워"라고 속삭여 보는 건 어떨까요? 가장 낮은 곳에서 당신을 떠받치는 존재들이 있기에 당신은 오늘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신발이 당신을 지탱하듯, 우리 사회도 서로가 서로를 알게 모르게 지탱하며 굴러갑니다. 오늘 누군가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면, 눈인사로 미안함을 전해보세요. 그 작은 배려가 조금은 따뜻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