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골목길의 왕자 시절
500원짜리 검정 고무신이 본 1970년대 골목 풍경.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뛰어다니던 그 시절, 신발도 계급이 있었다. 나이키를 신은 부잣집 아이와 맨발인 아이들 사이에서 검정 고무신이 목격한 인간 사회의 민낯.
골목의 서열
철수네 골목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서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신발'이 결정했다.
가장 높은 곳엔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은 민수가 있었다. 그 녀석 아버지는 명동에 가게를 가진 부자였다. 하얀 운동화는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냈고, 아이들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민수는 으스대며 말했다.
"너희 그 까만 거 뭐야? 시장 바닥에 깔린 거 아냐?"
나는 분했다. 까만 거라니. 나도 엄연히 신발이다. 고무 냄새가 좀 나고, 밑창이 좀 얇고, 비에 젖으면 물이 새는 것뿐이지. 하지만 철수는 내가 없으면 한 발짝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
민수 밑에는 '고무신 사단'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우리는 500원짜리 동료였다. 영희, 순이, 갑돌이, 덕구... 모두가 같은 신발을 신었고, 그래서 우리는 한 팀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철구가 그랬다. 그 녀석은 신발을 살 돈조차 없었다. 여름엔 괜찮았지만, 가을이 되자 발바닥은 갈라지고 피가 났다. 나는 철수의 발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철구의 맨발을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술래잡기의 정치학
골목 아이들의 세계는 단순했다. 술래잡기, 말뚝박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하지만 그 놀이 속에도 계급은 존재했다.
"야, 철수야! 넌 술래 해!"
민수가 명령조로 말했다. 철수는 대꾸하지 못했다. 왜? 민수는 프로스펙스를 신었으니까.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 나는 철수의 발을 감싸며 울분을 삼켰다. 이놈의 인간 세상은 신발 한 켤레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구나.
어느 날, 민수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하얀 프로스펙스는 흙투성이가 됐고, 민수는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그날 밤, 나는 철수의 발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저 비싼 운동화도 결국 흙을 밟잖아. 나랑 뭐가 다른 거지?'
아, 맞다. 가격표가 다르지. 인간들은 가격표로 모든 걸 판단한다. 500원짜리 나는 천덕꾸러기고, 5000원짜리 프로스펙스는 왕자님이다. 우습지 않은가. 결국 우리 모두 땅을 밟고, 흙을 묻히고, 닳아서 버려지는 운명인데.
축구공과 우정
그래도 좋은 날이 있었다. 골목 아이들이 모여 축구를 할 때였다. 누가 좋은 신발을 신었든, 누가 맨발이든, 공 하나면 모두가 평등해졌다.
"패스! 패스!"
철수가 소리쳤다. 공이 날아왔고, 나는 철수의 발등과 함께 공을 찼다. 쿵! 공은 골대(골목 벽에 그어놓은 선)로 날아갔다. 골인!
"잘했어, 철수야!"
그 순간만큼은 민수도, 철구도, 모두가 동등했다. 신발도, 계급도, 돈도 상관없었다. 오직 공을 차는 기쁨만이 존재했다. 나는 그날 깨달았다. 인간들이 진짜 행복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소유'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 할' 때구나.
하지만 놀이가 끝나면, 다시 현실이 돌아왔다. 민수는 깨끗한 집으로 돌아가고, 철수는 단칸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방 한구석에 던져져 천장을 보며 밤을 보냈다.
철구의 맨발
어느 가을 저녁, 나는 철구의 맨발을 똑바로 봤다. 발바닥은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고, 발가락 사이는 갈라져 있었다. 그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나는 알았다. 아프다는 걸. 춥다는 걸.
"철구야, 너 신발 없어?"
영희가 물었다. 철구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맨발이 더 편해. 땅이 느껴지잖아."
거짓말이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짓말.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왜? 모두가 가난했으니까. 철구의 가난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철수도, 영희도, 순이도, 모두 조금씩 가난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철수의 발을 보호하는 동안, 철구는 맨발로 자갈길을 걸었다. 신발은 선택받은 자의 특권이었고, 나는 그 특권의 일부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계절은 무심히 흘렀다. 가을이 깊어지고, 첫눈이 내릴 기미가 보였다. 철수 엄마는 헌 신문지를 구겨 내 안에 넣어줬다. 보온을 위해서였다. 나는 신문지 사이로 글자를 읽었다.
"...경제 성장률 10% 돌파..." "...강남 개발 본격화..."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숫자들이 춤을 췄다. 나라는 잘 산다고 했다. 하지만 철수네 단칸방은 여전히 춥고, 철구는 여전히 맨발이었다. 누구의 경제가, 누구의 성장이란 말인가.
나는 철수의 발을 꽉 감싸며 다짐했다. 적어도 이 발만큼은 내가 지키겠다고. 설령 내가 500원짜리 검정 고무신일지라도, 철수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신발이 되겠다고.
골목길은 저물어 갔고, 가로등 불빛 아래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철수의 작은 발. 그리고 그 발을 감싼 나, 검정 고무신. 우리는 오늘도 함께 집으로 향했다.
나의 생각!
신발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의 상징이고, 정체성의 표현이며, 때로는 존엄의 마지막 보루다. 1970년대 골목에서 프로스펙스와 검정 고무신, 그리고 맨발이 공존했듯, 오늘날에도 우리는 무언가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무엇을 신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아닐까. 당신의 신발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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