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질 드러운 영순이의 볼펜 " 나의 하루 "
(1화) 악마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영순이'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에어컨 빵빵! 나오는 '다이쏘'라는 매장 진열대에 단장하고 앉아 있었다. 아! 오늘 왜 이렇게 더운 거야 하는 소리와 동시에 자동문이 촤라락하며 긴 머리 처자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시선을 문구 쪽으로 휙 돌리더니 내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연필 녀석들을 그냥 지나치는 거로 봐선 사랑을 쓸려는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예전 대중 가수 히트곡에 " 사랑을 쓸려 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ㅋㅋㅋ) " 플로럴 향이 내 앞에 멈췄다. 향을 즐길 겨를도 없이 그녀가 날 보더니 휙~ 낚아 챈다. 어두운 가방 속으로 쳐 박혀 한 참을 지나 환한 빛을 본 것은 책상 위에 투다닥! 던져 졌을 때다. 그리고 나한테 "영순이꺼!" 라고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렇다 그녀가 승질 드러운 영순이었던 것이다. 우리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앞길이 녹 녹 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 했지만 주인님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ㅠㅠ 나의 원래 이름은 "모나미" 이다 지극히 평범한 볼펜이다. 잉크는 늘 충만했고, 볼은 매끄럽게 굴러갔다. 나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쓰임 받는 것" 이다. 글씨를 쓰고, 기록을 남기고, 때로는 중요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숙명이다. 이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길 원하던 나의 볼펜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빨간색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꼼꼼하고 일 잘하는 완벽주의 포스의 승질드러운 나의 주인님! " 이름하여 '영순이'.
나는 그날도 사무실 책상 위 펜꽂이에 꽂혀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햇살은 따스? 뜨거웠고, 창밖으로는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구구거렸다. '아, 이것이 볼펜의 낙원인가!' 생각하는 찰나,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펜꽂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눈을 떠보니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 진짜! 오늘은 기필코 이 보고서를 끝낸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이 보고서랑 같이 지옥 가는 일은 없을 거야!"
목소리는 부드럽고 명료했으나 포스가 느껴졌다. 마치 목화 솜 속의 얼음이랄까? 나는 직감했다. '왔구나. 나의 평화가 끝장나는 순간이.' 곧이어 그녀의 손이 펜꽂이로 뻗어왔다. 나는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정확히 나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잉크통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압력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볼펜은 울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제 운명을 받아들일 뿐.
"좋아, 모나미! 오늘 나와 함께 지옥의 문을 열어보자고!"
그녀는 나를 쥐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앞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악마인가? 이 서류들을 오늘 다 하겠다고?' 나는 경악했다. 그리고 곧이어 나의 잉크가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필압은 엄청났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온 힘을 실어 누르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와 짜증, 그리고 알 수 없는 비장함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 보고서, 왜 이렇게 내용이 부실해?! 다시! 다시 작성해! 그리고 이 표는 누가 봐도 삐뚤빼뚤하잖아! 각 잡아서 그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전쟁터의 총성과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보고서에 밑줄을 긋고, 첨삭을 하고,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녀의 속도에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그녀의 손가락은 나를 펜꽂이에 다시 내동댕이치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키미테도 안붙여 주고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머리긁고 ㅠㅠ (머리 긁는건 나름 플로럴 향에 그리 나뿌지 않음 ㅎㅎ)
"야, 너 지금 잠자는 거야? 정신 차려! 월급 루팡 할 거야?!"
나는 그녀의 질책에 등골이 오싹했다. 볼펜 주제에 월급 루팡이라니! 나는 볼펜계의 성실함을 담당하는 엘리트 볼펜이었다!
오후 6시, 정시 퇴근 시간. 다른 직원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나갔지만, 영순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은 더욱 이글거렸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지옥의 야근이!'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아메 커피 한 잔을 건네주는 대신, 야식으로 김밥 참기름을 발라주었다. 물론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녀가 김밥을 먹는 동안 나를 쥐고 서류를 뒤적였다는 뜻이다. 나는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잉크를 뿜어냈다.
밤 10시, 사무실에는 영순이와 나,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녀의 필기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쉴 새 없이 종이 위를 내달렸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끝없이 글씨를 썼다. 내 잉크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볼은 마찰열로 뜨거워졌다. '이대로 가다간 내 볼이 녹아버리겠어! 내가 펜인지, 용접기인지 헷갈릴 지경이군!'
새벽 1시, 드디어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끝났나... 제발.' 하지만 그녀는 쓰러져 잠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좋아!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인쇄하면 끝이야!"
나는 절망했다. '끝이 아니었어! 마지막이란 단어는 대체 몇 번을 들은 거지?'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마지막 검토를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오탈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꼼꼼함은 가히 집착에 가까웠다. '저 정도면 편집증 아닌가? 인간 세상에 저런 꼼꼼함으로 성공 못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마침내 새벽 3시, 모든 서류 작업이 끝났다. 영순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를 펜꽂이에 꽂아 넣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쓰러지듯 펜꽂이에 기대었다. 잉크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볼은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났다. '해냈다!'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운 작업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강렬한 성취감이었다.
나는 고요한 새벽 공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또 어떤 지옥 같은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최악을 경험하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이 고난의 연속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다. 승질 드러운 영순이와 함께라면, 나는 평범한 볼펜이 아닌, '지옥을 경험한 전설의 볼펜' 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에서 '영순이'처럼 유별나지만, 결과적으로 함께 성장하게 만든 사람은 누구였나요? 아니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영순이'같은 존재였던 적은 없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