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질드러운 영순이의 볼펜 " 나의 하루"
"나는 단지 볼펜이었을 뿐인데... 그녀를 만나 '인생 갈림길'에 섰다! "
(2화) 까칠한 그녀의 반전과 볼펜의 성장통
어느덧 영순이를 만난 지 한 달. 나의 잉크는 눈에 띄게 줄었고, 볼은 마모되어 까칠해졌다. 처음엔 그저 '악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영순이는, 이제 내 삶의 절반이 되어버린 존재였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에라도 걸린 건가 싶었다.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들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펜꽂이에서 홀로 녹슬어 가는 것보다 낫다는 이상한 합리화까지 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영순이의 손이 나를 낚아 챘다. "좋아, 모나미! 오늘은 어제 못 다한 기획안이야! 이 기획안이 성공하면, 우리 팀은 드디어 숨통이 트일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비장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아, 오늘 또 밤새겠구나.'
"팀장님, 그건 비효율적입니다. 일은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해야죠!"
그녀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질 때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이고, 영순아! 제발 좀 참아! 사회생활은 적당히 유들유들하게 하는 거야!' 내가 인간이었다면 그녀의 입을 틀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승질 드러움' 은 때로 빛을 발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관행을 그녀가 나서서 바로잡았고, 흐지부지될 뻔한 업무를 그녀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완성시켰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그녀의 '까칠함'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녀의 보고서는 늘 논리 정연했고, 그녀의 기획안은 허점 하나 찾기 힘들었다.
"영순 씨, 자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역시 자네밖에 없어!" 가끔 상사들이 이런 칭찬을 건넬 때면, 영순이는 시큰둥하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답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니, 영순아! 이럴 때는 좀 웃어주고 아첨도 좀 하고 그래야 사회생활이 편한 거야!'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기 기준에 맞는 완벽함' 을 추구했다.
어느 날 새벽, 야근을 하던 영순이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쥐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저렇게 살면 행복할까?'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려봤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작게, 내 볼펜 촉으로 그녀의 얼굴에 하트를 그려 보았다.
'영순아, 너도 가끔은 좀 쉬어. 네 까칠함 속에 숨겨진 외로움이 보여. 괜찮아,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나는 속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내가 볼펜 주제에 인간을 위로하다니! 그녀에게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에 공감하고 있었다. 마치 60년대 우리네 아버지들이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속으로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셨던 것처럼, 영순이의 까칠함 속에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강한 책임감과, 어쩌면 인정받고 싶은 외로운 마음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영순이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보고서... 수정해야 하는데..."
나는 깜짝 놀라 다시 그녀의 손에 꽉 쥐어졌다. '아, 이 여자는 자면서도 일 생각이야!' 나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그녀의 열정은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비록 나를 힘들게 할지언정, 그녀의 '프로페셔널리즘' 은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나는 글씨를 쓰는 것을 넘어, 그녀의 생각과 의지를 종이 위에 옮기는 '확성기' 가 된 것 같았다. 나의 잉크는 단순한 색소가 아니라, 그녀의 열정과 노력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영순이는 팀장에게 기획안을 제출했다. 팀장은 기획안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순 씨, 아주 잘했어! 역시 자네는 믿을만해!" 팀장의 칭찬에 영순이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미소를 봤다. 아주 짧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그동안 그녀가 감내했던 모든 스트레스와 노력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쥐여진 채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내 볼은 닳고 잉크는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나는 영순이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성취감에 벅찼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볼펜이 아니었다. 영순이의 '동반자' 이자, 그녀의 '열정의 증인' 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삶은 때로 까칠하고,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영순이의 까칠함은 어쩌면 그녀를 보호하는 갑옷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갑옷 속에서 피어나는 진짜 모습은,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진심인 아름다운 열정이었다.
비록 나의 잉크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영순이와 함께라면, 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녀의 빛나는 열정을 세상에 기록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승질드러운 영순이'가 아닌, '열정적인 영순이' 의 볼펜이었다.
여러분의 삶에서 겉으로는 까칠하지만, 내면에는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는 '영순이' 같은 사람은 누구였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