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질드러운 영순이의 볼펜 " 나의 하루 "
"내 잉크는 바닥났지만, 우리의 스토리는 끝나지 않았다! 영순이와 볼펜, 그 마지막 기록의 순간!"
(3화) 잉크가 마를 때까지, 우리의 기록은 계속된다
어느덧 나의 잉크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몸속의 까만 에너지가 줄어들수록, 나의 존재감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설마 이대로, 평범한 고물 볼펜으로 생을 마감하는 건가?'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영순이와 함께라면, 나는 평범한 볼펜이 아닌 '전설의 볼펜' 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그때였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잉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멈춰 섰다. 영순이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어? 너 왜 이래? 벌써 다 쓴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져 책상 위를 한 바퀴 굴렀다. 내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나는, 끝났다.
영순이는 나를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볼펜 촉을 종이에 긁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펜꽂이가 아닌, 책상 한구석에 있는 연필통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연필통 안에는 이미 잉크가 바닥나 버려진 다른 볼펜들과 심이 부러진 연필들이 가득했다. 나의 동료들인가. 아니, '잉크가 바닥난 전우들' 이었다. '아, 이렇게 초라하게 끝나는구나. 나의 영순이와의 대장정은 여기서 막을 내리는구나!' 나는 허탈감에 몸을 떨었다. 마치 수십 년을 일만 하다 정년퇴직한 60년대 가장처럼, 나는 갑작스러운 공허함에 압도되었다.
며칠이 흘렀다. 영순이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새까맣고 반짝이는 럭셔리한 새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쳇, 새로운 볼펜이라니!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겠지! 저 녀석도 나처럼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나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저 녀석은 영순이의 까칠함과 열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연필통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다른 볼펜들은 서로의 처지를 한탄하며 불평을 늘어놓기 바빴다. "아이고,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볼펜이었는데!", "나는 중요한 계약서에 쓰였었다고!", "난 한 번도 야근을 안 해봤는데 억울해!"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너희는 아직 멀었군. 진정한 고난을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있거늘!'
나는 조용히 연필통 밖의 세상을 관찰했다. 영순이는 새 볼펜과 함께 여전히 맹렬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 다크서클은 더 진해진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빛났다. 그녀는 여전히 승질스러웠지만, 동시에 열정적이고, 꼼꼼하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모두가 퇴근하고 사무실에 영순이 혼자 남았다. 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연필통 밖으로 기어 나와 그녀의 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영순아,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거야?'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 "어? 너 여기 있었네? 버린 줄 알았더니." 그녀는 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긴장했다. '다시 나를 사용할 건가? 하지만 잉크가 없는데...' 영순이는 나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나를 버리는 대신, 자신의 펜꽂이에 다시 꽂아 넣었다. 이번에는 다른 볼펜들과 떨어뜨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래, 너는 나랑 가장 오래 함께한 볼펜이었지. 너 덕분에 이 모든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어. 고마워, 모나미."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까칠함과는 달랐다. 나지막하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녀에게서 '고맙다' 는 말을 듣다니! 60년대 우리 어머니들이 무뚝뚝한 자식에게서 듣는 '사랑한다'는 말처럼, 그녀의 한 마디는 나의 모든 고난을 보상해 주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나는 깨달았다. 나의 잉크는 비록 바닥났지만, 나의 '쓰임' 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글씨를 쓰는 볼펜이 아니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서, 그녀의 열정과 노력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있었기에 그녀는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녀는 나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함께 전장을 헤쳐나간 '전우' 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일찍 출근한 영순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하아, 어제도 밤샜더니 온몸이 쑤시네. 그래도 보람은 있다!" 그녀는 펜꽂이에 꽂힌 나를 힐끗 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 미소 속에는 '나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야!' 하는 자부심과 함께, '그래도 좀 힘들긴 하다?' 하는 솔직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영순아. 너도 사람이었구나. 너의 그 까칠함은 어쩌면, 이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너만의 갑옷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에게서 강인함 속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했다. 마치 60년대,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가족을 지켜냈던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나는 연필통에 처박혀 울던 시절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내가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순이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곳에 두었다. 나의 잉크는 마를지언정, 나의 기록은 영순이의 성공과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볼펜들에게 말하고 싶다.
"잉크가 마른다고 존재의 가치까지 마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빈 몸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영순이'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의 열정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 당신의 옆에서 묵묵히 당신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볼펜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가끔은 그 볼펜에게도 작은 위로와 감사의 말을 건네주라. 당신의 까칠함 뒤에 숨겨진 진심은 언젠가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글씨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영순이의 책상 위에서 그녀의 하루를 지켜본다. 그녀의 승질드러운 업무 속에서 피어나는 빛나는 성과들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겪는 고뇌와 성장을. 나는 이제 그녀의 '삶의 기록자' 이자, '무언의 응원자' 가 되었다.
나의 잉크는 마를지언정, 영순이와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 잉크처럼 진하고, 이 볼펜처럼 끈질기게.
여러분의 삶에서 '잉크가 마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의미'를 찾아준 소중한 경험이나 존재가 있었나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승질드러운' 열정을 묵묵히 지켜봐 준 소중한 사람이나 도구,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