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기 삐삐의 " 나의 하루 "(1~5화)
(1화) 태어남, 그리고 첫 울림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삐-삐-' 하고 울리면, 사람들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내가 품은 숫자가 사랑일지, 이별일지, 급한 소식일지는 아무도 몰랐지. 그렇게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아니,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검고 투명한 플라스틱 껍데기 속에 갇혀 있던 긴 시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름도, 형태도 없는, 그저 기계 부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낯선 손길이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나사가 조여지고, 작은 회로들이 연결되었다. 차가웠던 내 몸에 알 수 없는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눈을 떴다. 내 앞에는 빛나는 액정이 있었고, 내 몸에는 작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삐-삐-." 나에게서 처음으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달랐다. 투박하면서도 경쾌하고, 단순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그런 소리였다. 나는 이제 삐삐였다.
나의 첫 주인은 어느 멋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나를 허리춤에 조심스럽게 달았다. 철컥! 플라스틱 고리가 허리띠에 걸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세상과 연결되었다. 나는 주인의 몸에 딱 붙어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나도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면 나도 함께 들썩였다.
나의 하루는 온통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시끄러운 버스 소리, 거리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왁자지껄한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소리들 속에서 나는 나만의 소리를 내기 위해 준비했다. 나는 기다렸다. 누군가가 나를 찾고, 나를 부르기를.
'삐-삐-'
드디어 나의 첫 울림이 시작되었다. 주인은 깜짝 놀라 허리춤의 나를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희미하게 숫자가 떠 있었다. "1004." 주인은 그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나는 그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며, 그의 설레는 발걸음을 고스란히 느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1004'라는 네 개의 숫자가 왜 주인을 저토록 설레게 하는지. '천사'라는 뜻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숫자 조합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 후로도 수많은 숫자들이 나를 찾아왔다.
"8282." (빨리빨리), "02 885 6456" ,"7942." (친구사이),"045." (빵사오)
나는 주인에게 날아드는 숫자를 묵묵히 보여주었다. 주인은 숫자를 보고 웃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검은 바탕에 하얀 숫자만을 띄울 뿐이었지만, 그 숫자들이 품고 있는 감정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무언의 증인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전하는 숫자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메시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삐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