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기 삐삐의 " 나의 하루 "
(2화) 숫자로 읽는 마음
"나는 오직 숫자로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단순한 숫자로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통보하고, 우정을 확인했다. ‘1004’라는 숫자 하나가 ‘천사’가 될 수 있었던 시절.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저 여러개의 플라스틱 버튼과 작은 액정 하나를 가진 존재였다. 말도 못 하고,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그저 그런 기계 쪼가리. 그런데 주인은 나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온갖 감정을 쏟아냈다. 그가 웃으면 나도 덩달아 덜컥였고, 그가 한숨을 쉬면 나도 모르게 축 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저 무거운 감정의 짐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주인과 한 몸이 되어 세상의 온갖 소리들을 들었다. 버스 안내양의 "오라이!", 엿장수 아저씨의 쨍그렁거리는 가위 소리, 늦은 밤 길거리를 울리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같은 유행가. 하지만 나에게 가장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나만이 낼 수 있는 소리, 바로 '삐~삐~'였다.
내 몸이 울릴 때마다 주인은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눈을 번뜩였다. 액정에 숫자가 뜰 때마다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하루는 '1004'라는 숫자가 떴다. 주인은 그 숫자를 보더니 광대가 터져라 웃으며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나는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함께 뛰면서 생각했다. '1004'가 대체 뭐길래 저리 좋을까? 그에게는 '천사'라는 뜻이었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1, 0, 0, 4'라는 네 개의 숫자에 불과했다. 나는 그저 무미건조한 사실을 전했을 뿐인데, 주인은 그 속에서 달콤한 사랑을 찾아냈다.
하지만 모든 숫자가 '1004'처럼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삐~삐~'
또다시 내 몸이 울렸다. 이번에는 '0000'. 주인은 그 숫자를 보더니 멍하니 멈춰 섰다. 나는 주인의 허리춤에 매달려 함께 굳어버렸다. '떠난다'는 의미의 숫자였다. 주인은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희망을 전하는 것도 나지만, 절망을 전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내가 전하는 숫자는 결코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물론, 모든 숫자가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7942." (친구사이) "045." (빵사오) "1212." (일이일이해-심심해)
이런 숫자들은 주로 주인의 친구들이 보낸 것이었다. 주인은 이 숫자를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거나, '아이 참, 저 녀석들 진짜!' 하면서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들의 시시콜콜한 장난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이란 것도 이렇게 단순한 숫자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빵사오'라는 유치한 숫자 하나에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는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숫자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 주인에게 '119'라는 숫자가 도착했다. 나는 정신없이 울부짖었고, 주인은 그날 가장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긴박함에 떨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직결된 중요한 메신저였다.
내 울림 한 번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할 수도 있었다.
나는 묵묵히 내게 도착하는 숫자들을 보여주었다. 그 숫자들은 주인에게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시대, 그 시절을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본 증인이었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흡수하며, 단순히 삐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운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직 숫자로만 마음을 전해야 한다면, 어떤 숫자를 누르시겠어요?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의 숫자를 보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삐삐라면, 어떤 숫자를 받았을 때 가장 기뻤을 것 같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