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길 모퉁이 가로등의 "나의 하루"(1~5화) - (1화) 첫 불빛, 그리고 시작되는 군상

 

달동네 길 모퉁이 가로등의 " 나의 하루 "

나는 달동네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낡은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나를 그저 어둠을 밝히는 도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내 안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다. 해 질 녘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새벽녘 불이 꺼질 때까지, 나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숨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나의 하루는 단순한 빛의 점멸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과 좌절,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달동네 서민들의 애환을 비추는 거울이자,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여정이다. 지금부터, 나의 눈으로 본 달동네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1화) 첫 불빛, 그리고 시작되는 군상



"내가 켜지는 순간, 그들의 하루는 비로소 시작되거나, 혹은 끝이 납니다. 과연 오늘의 그림자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나는 오늘도 해 질 녘 정확히 6시 30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에 빛을 선물했다. 저 멀리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경쟁하듯 솟아오를 때, 나는 묵묵히 이 달동네 모퉁이를 지킨다. 내 빛은 화려하지 않다. 그저 노랗고 낡은 전구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때로는 흔들리는, 그래서 더 따뜻하고 정겨운 빛이다. 이 빛이 켜지는 순간, 달동네의 하루는 비로소 나만의 무대가 된다.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건 김 씨 아저씨였다. 그의 등은 낮 동안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굽어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개는 일, 그는 젊은 날의 강골이 세월의 풍파에 깎여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땀으로 축축한 작업복에서는 흙먼지와 눅진한 하루의 피로가 배어 나왔다. 아저씨는 매일 저녁, 내 아래를 지날 때마다 허리를 두드리며 "에구구, 오늘 하루도 살았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어찌나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빛이라도 더 환하게 비춰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 역시 낡은 가로등일 뿐,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따뜻한 빛과 묵묵한 응시뿐이었다.

얼마 후, 통닭집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배달 청년 용식이였다. 그는 늘 헬멧을 쓴 채 바쁘게 내 앞을 지나쳤지만, 가끔 멈춰 서서 스마트폰으로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 오늘 따라 배달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 아,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그래도  버텨야지." 그의 목소리에는 투정과 사랑이 뒤섞여 있었고, 나는 그 목소리 속에서 젊은이의 고단함과 희망을 동시에 보았다. 언젠가 그가 통화 중에 "나 이제 결혼해요!"라고 외칠 날이 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 순간 만큼은 내 전구를 새로 갈아 끼운 듯 밝게 빛나리라 다짐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아래를 지나는 이들은 더 다양해졌다. 늦은 시간까지 가게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아주머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터벅터벅 걷는 학생, 그리고 가끔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 발걸음, 한숨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읽었다. 누구는 내 빛을 벗 삼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누구는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잠시 세상을 피하고 싶어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비 오는 날 밤이었다. 빗물이 내 빛을 타고 흐르며 묘한 빛의 물결을 만들었다. 그때 한 노부부가 내 아래서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연신 기침을 했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할머니의 등을 쓸어주었다. 할아버지는 낡은 지갑에서 주름진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망설이다가, 할머니 손에 쥐여 주었다. "당신, 내일 병원 가서 약이라도 타 와. 나는 괜찮아." 할머니는 그 돈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할아버지의 단호한 눈빛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지, 그리고 그 사랑이 고단한 삶 속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깨달았다. 내 빛은 빗물에 희미해지는 듯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내 빛보다 더 강렬하게 골목을 밝혔다.

나는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내 빛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고, 낡은 이야기는 깊이를 더한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달동네 사람들의 삶과 함께 흘러간다.

----------------------------------------------------------------------------------------------------------

여러분! 당신의 하루를 비추는 빛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