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길 모퉁이 가로등의 " 나의 하루 "
(3화) 가로등 아래, 빛과 그림자의 비밀 공유
"내가 '깜빡'이는 순간, 아이들은 귀신을 봅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비밀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의 세 번째 밤은 어떤 비밀을 엿들을까요?"
내 세 번째 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손님들이 나를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의 빛은 언제나처럼 달동네 길 모퉁이를 비추며, 밤의 서막을 알렸다.
"야, 조심해! 공 저기로 넘어가면 혼난다!" "흥! 가로등 아저씨가 지켜보고 있는데 뭘!"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골목 아이들이 낡은 축구공을 차며 내 밑을 지나갔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부러 '깜빡!' 하고 한 번 흔들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멈춰 서더니, "와! 귀신이다!", "가로등이 사람 말을 알아듣나 봐!"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너희들은 내가 그저 '깜빡'거리는 줄만 알겠지만, 사실 나는 너희들의 순수한 웃음소리와 투정 섞인 외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말해봤자 너희들은 듣지도 않겠지. 나는 빛을 낼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직접 대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질 때쯤, 내 바로 앞 전봇대 밑에 사는 폐지 줍는 할머니가 비척거리며 나타났다. 그녀는 오늘도 해가 채 지기도 전에 허리를 숙여 폐지를 줍고 있었을 터였다. 할머니는 내 불빛 아래 짐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가로등은 나보다 늦게 들어오고, 나보다 먼저 나가네. 참 팔자 좋여."
그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다. 할머니는 해도 지기 전에 출근하고, 내가 꺼지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할머니보다 조금 더 길게 깨어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 달동네에서 세상의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할머니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나는 왠지 모를 씁쓸한 감동에 휩싸였다.
참, 얼마 전엔 새 가로등이 들어올 뻔했었다. 밝고, 에너지 절약형이고, 심지어 스마트하다는 녀석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센서로 움직임을 감지하고, 상황에 따라 밝기 조절도 가능하다"나. 아~우씌! 흥~칫!. 나는 그런 걸 못 한다. 나는 그냥, 켜지고, 비추고, 꺼질 뿐이다. 나에게 그런 화려한 기능은 없다. 나는 그저 묵묵히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래도 아직 교체 안 된 걸 보면, 나름 쓸모는 있는가 보다. 아마 이 달동네 사람들도, 낡고 투박하지만 변함없는 내 빛에 정이 들었을 테지. 새것의 편리함보다 낡은 것의 익숙함이 더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밤이 깊어질수록 내 빛 아래는 더욱 다양한 사연들로 채워졌다.
배달 청년 용식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인지 여자친구와 급기야 내 불빛 아래서 격렬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여자는 울고 용식이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빛은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다른 날 밤엔 술에 취한 취객이 내게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그의 눈물과 콧물은 내 낡은 몸통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나는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들의 어둠과 슬픔이 내게로 쏟아지는 걸, 묵묵히 받아냈다. 마치 이 달동네의 모든 슬픔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역할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화려하진 않지만, 이 달동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그 무엇. 누군가에게는 밤길을 밝혀주는 이정표가 되어주고,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을 감춰주는 그림자가 되어주며, 또 누군가에게는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묵묵한 청자가 되어주는 존재. 나는 오늘도 그렇게 달동네의 밤을 지켰다.
나의 낡은 빛이, 이 고단한 삶 속에서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화려하진 않지만 꼭 필요한' 존재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