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계바늘 " 나의하루 "
분침의 분노
내 이름은 시침. 정식명칭은 '시간의 대사(大使)', 통칭 ‘느림보’.
태어난 지 132년 된 고풍스러운 괘종 시계 안에 살고 있다. 등나무로 만든 몸, 금색 테두리의 유리창, 그리고 매시간 정각마다 우렁찬 종소리를 울리는 묵직한 품격. 누가 뭐래도, 난 자부심 강한 시계의 주인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야. 또 멍때리냐?”
익숙한 목소리. 분침이다.
“한 바퀴 도는 데 12시간씩 걸리면서 뭐가 그렇게 거만하냐?
나 같으면 지겨워서 관 뚜껑 열고 나왔을걸?”
난 무심히 웃어넘겼다. 언제나처럼.
분침은 매 60분마다 한 칸을 ‘톡’ 하고 움직인다. 속도감에 있어선 나보다 훨씬 우위다. 아침이면 벌떡 일어나 시계를 돌리고, 점심이면 덜컥 움직이고, 저녁이면 쉼 없이 뛰어다닌다.
그에 비해 나는 하루 종일 12칸. 느릿느릿, 신중하게, 품격 있게.
“네가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돌아가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말꼬리를 잡았다. “생각은 해봤냐? 나 없이 네가 의미 없다는 거?”
그 순간 분침의 톱니가 딱, 걸렸다. 그는 잠시 멈춰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맞아. 너 없으면 나 혼자서도 쓸모 없지.
근데 너도 알지? 네가 멈추면 사람들은 시계를 버려. 나보다 먼저.”
…정곡을 찔렸다.
맞다. 아무리 느릿해도, 품격을 지켜도, 내가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날 '고장'으로 간주한다. 세상의 시간은 정확함과 신속함을 요구하지, 의미나 철학은 둘째다.
나는 괘종 시계의 심장을 울리며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둘 다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거네. 네가 있어야 시간이 생기고, 내가 있어야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게 되지.”
분침은 아무 말 없이 다음 칸으로 ‘톡’ 하고 움직였다. 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고, 느리다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시간은 빠름과 느림이 조화를 이룰 때 진짜로 흐른다."
초침의 난입
아침 7시 59분 59초.
방 안은 조용했고, 나와 분침은 또다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제의 말다툼 이후로 말수를 줄였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찢고 죽이고 갈아버릴 거야아아!!!”
띠리리리리리릭! 미친 듯이 회전하며 등장한 초침.
그 애는 1초에 한 번씩 고개를 까딱이며 늘 이성을 놓은 채 살아간다. 아니, 뛰어다닌다. 아니지. 날아다닌다.
“늦었어! 늦었단 말이야!! 왜 아직도 7시야?! 난 지금 벌써 점심약속 두 개 펑크야!!”
나는 조용히 중얼였다.
“초침, 넌 시계를 보는 게 아니라 인생을 쫓고 있구나…”
초침은 헐떡이며 벽에 붙은 스마트워치를 향해 소리쳤다.
“쟤는 벌써 8:00 넘어갔어! 우린 왜 이러고 살아?! 왜 이딴 구식 기계 안에 갇혀서 느릿느릿~”
“느릿하다고 무능한 건 아니야.” 분침이 말했다.
“그리고 빠르다고 다 생산적인 것도 아니지.” 내가 덧붙였다.
초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짧은 1초조차, 아무 말도 없이 멈춰 있었다. 그러곤 고개를 툭 떨구었다.
“…가끔은 그냥 쉬고 싶어.”
"속도는 선택이 아니라 방향의 일부다. 누구나 달릴 수 있지만, 모두가 목적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다."
종소리의 증언
정각 12시. 괘종 시계의 종이 열두 번 울렸다.
쿵. 쿵. 쿵. 시간의 무게처럼 무겁고, 존재의 의미처럼 명확한 소리.
우리는 셋 다 입을 닫고 종소리를 들었다. 초침도 멈췄고, 분침도 고개를 푹 숙였으며, 나 역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 갑작스레 종이 말했다.
“너희 셋 다 시계의 일부인 동시에,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존재야.”
우리는 당황했다. 평생 종은 말이 없었다.
“너, 이제 말해?”
초침이 물었고, 종은 대답했다.
“말이 없는 줄 알았던 건, 너희가 너무 시끄러워서 못 들은 거야.”
순간, 숙연해졌다.
“초침. 넌 세상이 얼마나 급박한지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빠르면 아무것도 못 느껴.”
“분침. 넌 변화의 리듬을 만들지. 그러나 남과 비교하느라 지치기도 해.”
“시침. 넌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지만, 세상의 속도를 외면해선 안 되지.”
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속도와 의미는 서로를 필요로 해.
모든 바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시계는 시간을 ‘말할 수’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종은 다시 침묵했다.
"우리의 삶은 시침, 분침, 초침처럼 조화로울 때 비로소 '지금'을 살 수 있다. 빠름도, 느림도, 멈춤도 모두 ‘시간’의 일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