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물들러 왔습니다, 나의 이름은 가을(1~5화) - (1화) 하늘!

안녕하세요? '독거놀인'입니다.

[프롤로그] 나는 지워지지 않는 '번짐'입니다

나는 늘 예고 없이 도착합니다. 

당신이 여름의 열기에 취해 헐떡이고 있을 때, 혹은 지루한 장마에 마음마저 눅눅해져 있을 때, 나는 아주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갑니다. 

창틀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한 줄기, 아침 출근길 코끝을 스치는 낯선 공기 냄새, 그리고 퇴근길 서쪽 하늘을 태우는 저녁노을의 색깔로 나는 내 존재를 알립니다.

사람들은 나를 '가을'이라고 부르더군요. 붓을 든 화가라고도 하고,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화가가 아닙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칠해 덮어버리는 건 내 방식이 아닙니다. 

나는 '스며드는 존재'입니다. 

종이 위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섬유 조직을 타고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이 번져나가듯, 나는 당신의 일상과 감각,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으로 번져갑니다.

나는 '물듦'입니다. 

뻣뻣하게 날이 선 당신의 이성을 무장 해제시키고, 메마른 감성에 촉촉한 수분을 공급하며, 당신이 잊고 살았던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기어이 끄집어내는 '감성'입니다. 

내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색깔을 찾도록 돕는 것. 여름 내내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집단 속에 숨어 있던 당신이, 비로소 당신만의 고유한 붉은색, 노란색, 갈색을 띠게 만드는 것입니다.

준비되셨나요? 

이제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이라는 하얀 도화지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혼돈으로 물들어가는지에 대한 기록이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긴 고백입니다.




(1화) 하늘, 고개를 들게 만드는 '여백의 미학'

"당신의 목 디스크를 치료해 드립니다. 꽉 막힌 인생에 숨구멍을 뚫어주는 파란 처방전!"


내가 도착해서 가장 먼저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는 곳은 바로 '하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름의 하늘은 너무 가깝고 답답했잖아요?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짓누르는 회색 천장 같았죠. 사람들은 그 무게에 눌려 땅만 보고 걷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네모 감옥에 시선을 가둔 채,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짜증을 냅니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늘을 밀어 올립니다. 아주 높이, 더 높이.

"영차! 자, 이만큼이면 숨 좀 쉬겠지?"

내가 하늘을 높이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구름이라는 장식품을 싹 치워버리거나, 물기를 쫙 빼서 가볍게 만드는 것이죠. 습도가 사라진 하늘은 투명한 코발트블루로 빛납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듭니다.

"와, 하늘 진짜 높다."

그 감탄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짜릿한 희열을 느낍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하늘을 비워둔 건, 그저 보기에 좋으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여백'을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이라는 종족은 '채움 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정을 채우고, 통장을 채우고, 스펙을 채우고, 심지어 쉴 때조차 유튜브 영상으로 뇌를 채웁니다. 비어 있는 꼴을 못 봅니다. 불안하니까요. 공백은 곧 도태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당신들에게 나는 광활한 파란 여백을 들이밉니다.

"자, 여기 아무것도 없어. 광고판도 없고, 알림 배너도 없어. 그냥 텅 비어 있어. 어때, 불안해?"

처음엔 당황하던 사람들도 이내 그 거대한 텅 빔 속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맑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꽉 막혀 있던 뇌의 회로가 풀리고, 가슴 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그 파란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나는 봅니다. 

점심시간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는 추 대리의 눈동자에 파란 물이 드는 것을. 옥상에 올라와 담배 대신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천 과장의 폐부 깊숙이 내 서늘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나의 파란색은 당신을 씻겨주는 세정제입니다. 복잡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마음, 나를 괴롭히는 자책감... 그런 찌꺼기들을 희석해 줍니다.

나는 붓질을 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에, 당신의 호흡에 이미 파랗게 물들었습니다.

때로는 저녁이 되면 나는 '노을'이라는 이름의 보라색, 주황색 잉크를 과감하게 쏟아붓습니다. 퇴근길 버스 창가에 기댄 당신의 지친 얼굴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낮 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당신에게, 나는 말없이 색으로 말을 겁니다.

'오늘 하루도 애썼어. 뜨거웠던 태양도 이제 식혀서 보낼게. 너도 이제 그만 열을 식혀.'

나의 노을은 당신의 볼을, 당신의 손등을 붉게 물들입니다. 그건 술기운이 아닙니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뜨겁게 살아냈다는 훈장입니다. 붉게 타오르다 서서히 어둠으로 스며드는 저녁 하늘을 보며, 당신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추락하는 것이 슬픈 게 아니라, 사라지는 뒷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요.

나는 당신에게 '높음'을 가르치러 온 게 아닙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 행위, 그 찰나의 멈춤이 당신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주러 왔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흔한 격언을, 나는 내 몸인 하늘 전체를 통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하루에 한 번쯤은 나를 봐주세요. 당신의 빡빡한 도화지에 내가 '파란 쉼표' 하나 콕 찍어드릴 테니까요.



나의 생각!

삶이 숨 막히게 답답할 때, 우리는 문제의 한가운데 갇혀 있기 쉽습니다. 가을 하늘은 말합니다. 문제에서 눈을 돌려 고개를 들라고. 시선을 높이면, 땅에서의 고민은 점처럼 작아집니다. '비어 있음'은 무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파란 하늘 같은 여백을 허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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