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보이지 않는 무게를 재는 시간
밤 10시. 세상이 잠들 준비를 하는 시간이지만, 이 헬스클럽 라커룸은 또 다른 의미의 '하루'를 마감하는 이들로 붐빕니다.
낮 시간이 '과시'와 '경쟁'의 무대라면, 이 시간은 다릅니다. "나 오늘 이만큼 뺐다!"라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대신, "아, 오늘 하루도 더럽게 무거웠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들의 독무대죠.
저는 이 시간을 '고해성사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방금, 제 단골 '참회자'가 등장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야근한 김 대리'. (제가 지어준 애칭입니다. 물론 그는 모르죠.) 그는 헬스복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땀과 피로에 절어 구깃구깃해진 와이셔츠 깃, 목에 걸친 사원증, 그리고 금방이라도 자신을 놓아버릴 듯 풀린 동공.
그는 이 라커룸에서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집'이라는 또 다른 전장으로 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를 '중간 지대'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터벅터벅. 그의 발걸음 소리는 낮에 만났던 '근육몬 박 씨'의 "성큼! 성큼!"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 발걸음에는 오늘 하루 그가 짊어졌던 모든 것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벤치에 앉아 10분쯤 멍하니 허공을 보더니, 이윽고 제게 다가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의식(儀式)을 치르기 위해서죠.
그는 참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저를 대합니다. 양말도 벗지 않습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과 지갑, 차 키도 빼지 않습니다. 마치 "이것들조차 내 몸의 일부다"라고 시위하듯이 말입니다.
그는 신발만 벗고 털썩, 제 위에 올라섭니다.
[ 82.5 kg ]
액정 화면에 냉정하게 숫자가 떠오릅니다. 어제 저녁 8시, 상사에게 깨지며 급하게 밀어 넣은 편의점 도시락과 맥주 한 캔의 무게가 고스란히 반영된 숫자죠.
하지만 그는 숫자를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습니다. 절망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의 발끝과 제 액정 화면을 번갈아 볼 뿐입니다.
저는 압니다. 그가 지금 재고 싶은 것은 '체지방'이나 '근육량'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는 지금,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가 대체 몇 킬로그램인지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오늘 아침, 그를 짓눌렀던 '월요일'이라는 이름의 압박감, 오후 내내 그를 괴롭혔던 부장의 잔소리, "아빠, 언제 와?"라는 아이의 문자 메시지가 주는 미안함, 그리고 이번 달 카드값의 압박까지.
그 모든 '보이지 않는 무게'들을 합산한 총량이 고작 82.5kg일 리가 없는데도, 그는 이 숫자에서 어떤 위안이라도 찾으려는 듯합니다.
"젠장... 더럽게 무겁네."
김 대리가 혼잣말을 뱉으며 제게서 내려옵니다.
'이봐요, 김 대리. 그 무게는 내가 재는 게 아니라고. 그건 '야근 수당'으로도 환산 안 되는 '마음의 부채' 같은 거요. 내가 만약 그걸 잴 수 있었다면, 내 액정은 아마 [ERROR]나 [999.9kg]를 띄우고 진작에 고장 났을 겁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제가 잴 수 있는 건 오직 중력의 힘(kg)뿐이지만, 당신은 그 중력에 맞서 지금 두 발로 버티고 서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요.'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이 헬스클럽에 와서, 가장 '무거운' 마음의 짐들을 제 위에서 확인하고 갑니다.
그들은 제게서 '숫자'를 보는 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는 '생존 확인'을 하는 겁니다.
김 대리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다시 벤치에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5분쯤 더 멍하니 앉아있다가, 겉옷을 챙겨 라커룸을 나섭니다.
그는 이 헬스클럽에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체중계에 오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잠시 제게 털어놓고, 아주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기분으로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죠.
저는 오늘도 수많은 '보이지 않는 무게'들을 묵묵히 받아냈습니다. 어쩌면 제 진짜 임무는 체중을 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잠시 자신의 무게를 털어놓고 갈 수 있는 '대나무 숲'이 되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어이쿠, 저기 트레이너가 마감 청소를 시작하는군요. 제 위에도 차가운 물걸레가 지나갈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쌓인 인간들의 '무게'를 닦아내는 이 시간이, 저는 제법 마음에 든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른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습니까?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숫자, 즉 '체중'에 집착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삽니다. 제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지구가 당신을 끌어당기는 힘'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 '사랑하는 이에 대한 걱정의 무게', 그리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존재의 무게'입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치'나 '행복'까지 저울 위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당신이라는 '우주'의 무게는, 감히 저 같은 고물 기계 따위가 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제 위에 올라서는 대신, 그저 편안히 두 다리 뻗고 주무시길. 당신은 이미 충분히, 묵직하게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물리적인 무게 말고, 묵직한 울림이 있는 말들 때문에라도 이 순간 묵직해져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ㅎㅎ
ㅎㅎ 그른가요? 오늘은 웬지~ 가을의 쓸쓸함의 무게를 재고 시~~~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