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넵"병 환자와 그림자의 로우킥
오전 10시. 사무실의 공기는 습식 사우나처럼 끈적하고 무겁다. 타닥타닥, 영혼 없는 키보드 소리만이 정적을 메운다. 이 시간의 사무실 바닥은 우리 그림자들에게는 '가시밭길'이다. 주인들이 내뿜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시커먼 안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철수 대리의 책상 밑에 웅크린 채, 그가 다리를 떨 때마다 전해지는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덜덜덜덜. 진도 3.0의 지진이 내 정수리를 강타한다.
"김 대리, 잠깐 회의실로 좀 오지?"
저승사자의 호출이다. 아니, 박 부장이다. 박 부장. 그는 존재 자체로 공간을 압도하는 재주가 있다. 그가 걸어올 때면 바닥의 그림자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선다.
그의 그림자는… 뭐랄까, 거대하고 축축한 곰팡이 덩어리 같다.
주인인 박 부장이 탐욕과 오만으로 배를 채울수록, 그의 그림자도 비대해져서 이제는 제 주인의 발보다 세 배는 더 넓은 영역을 시커멓게 뒤덮고 다닌다. 나는 저 녀석을 속으로 '멍텅구리'라고 부른다. 덩치만 컸지, 주인의 눈치나 보며 아부하는 다른 그림자들을 깔아뭉개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회의실 공기는 더 차갑다. 김철수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다. 나는 그의 발밑에서 납작하게 엎드려 동태를 살핀다.
"김 대리, 지난번 그 기획안 말이야. 내가 주말에 골프 치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박 부장이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는다. 그의 그림자 '멍텅구리'가 의자 밑에서 흘러넘쳐 회의실 바닥의 절반을 잠식한다. 놈은 거대한 하품을 하며 나를 흘깃 내려다본다.
'쫄았냐?'는 눈빛이다. 흥, 웃기고 있네.
"방향성을 완전히 바꿔야겠어. 지금 트렌드가 그게 아니잖아. 좀 더 '임팩트' 있고, '엣지' 있게. 알지? 무슨 말인지?" 박 부장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이고 무책임하다. 임팩트? 엣지? 그게 구체적으로 뭔데? 네가 모르는 걸 왜 우리 주인한테 내놓으래?
나는 김철수의 본심을 읽는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시뻘건 마그마가 끓어오른다. '(미친 X... 지난주엔 이 방향이 최고라며! 주말 내내 고생해서 만들었더니 이제 와서 엎으라고? 네가 말한 임팩트가 도대체 뭔데! 망할 영감탱이!)'
그의 속마음은 이렇게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그래, 철수야! 이번엔 참지 마! 한 마디 해! 안 된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너의 그 뜨거운 본심을 입 밖으로 꺼내! 나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발목을 붙잡고 흔들며 응원했다.
하지만, 김철수의 입은 그의 뇌보다 빨랐다. 수년간의 직장 생활로 다져진, 비굴한 조건 반사가 작동했다.
"넵! 알겠습니다. 부장님 말씀대로 전면 수정해서 내일 아침까지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뭐? 넵? 내일 아침?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림자에게 귀가 있다면 말이다.) 이 멍청한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오늘 밤을 꼬박 새워도 불가능한 일을, 심지어 웃으면서 '넵'이라고?
그 순간, 김철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자존감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고스란히 바닥으로 쏟아져 내려 나를 찔렀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주인의 비굴함은 내게 가장 큰 고통이다. 나는 바닥에 나뒹굴며 괴로워했다. 내 몸이 수치심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분노로 시커멓게 부풀어 올랐다.
반면, 박 부장의 그림자 '멍텅구리'는 의기양양하게 배를 내밀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마치 제 주인이 승리한 장군이라도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나를 짓밟으려 했다.
"하여간, 김 대리는 착해서 좋아. 요즘 애들 같지 않단 말이야. 허허허." 박 부장의 웃음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김철수는 여전히 90도로 허리를 숙인 채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주인이 못하면, 나라도 한다.
김철수가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그 순간, 나는 그 반동을 이용했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탄력을 받아 튀어 나갔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박 부장의 그림자, 저 역겨운 '멍텅구리'의 정강이였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증오와 분노, 그리고 김철수가 억누른 야근의 피로를 한데 모아 오른쪽 다리에 실었다. 그림자 세계의 물리법칙을 무시한, 순수한 '악'으로 만들어진 일격이었다.
콰직!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 세계에서는 천둥 같은 충격파가 발생했다. 나의 날카로운 로우킥이 멍텅구리의 정강이(라고 추정되는 부위)를 정확히 강타했다.
"끄어억!" 물론 박 부장의 비명은 아니다. 그의 그림자, 멍텅구리가 바닥을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놈의 거대한 몸집이 순간적으로 젤리처럼 출렁거리며 쪼그라들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멍텅구리의 거대한 몸집 속에 숨겨져 있던, 아주 작고 초라하고 겁에 질린 박 부장의 진짜 내면을. 놈도 결국 강한 척 연기하는 겁쟁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도 이변이 일어났다. "어이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박 부장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마치 누군가 의자 다리를 발로 찬 것처럼.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바닥이 왜 이렇게 미끄러워? 청소 아줌마 제대로 안 하나?" 박 부장은 애꿎은 바닥 탓을 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당혹감.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김철수도 놀란 눈치였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박 부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그림자도 힘들면 숨이 찬다) 김철수의 발밑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나의 심장(이 있다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해냈다. 내가 저 거만한 인간의 그림자에게 한 방 먹였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 김철수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내일 아침까지 마감해야 할 산더미 같은 업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의 발걸음 속에 미세하게 섞여 있는 묘한 통쾌함을. 그는 자기가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박 부장이 꼴사납게 휘청거린 게 고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내가 대신 싸워준 덕분이라는 것을. 김철수 씨, 오늘은 내가 네 대신 질러줬어. 그러니까 오늘 밤 야근할 때, 적어도 마음속으로 울지는 마라. 네 그림자는 생각보다 깡이 세니까.
나는 다시 그의 책상 밑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멍텅구리의 정강이를 걷어찬 내 발이 욱신거렸다. 영광의 상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