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시스템 Burnout, 그림자의 강제 종료
"주인의 퓨즈가 나갔습니다. 더 이상 가짜 웃음을 지을 에너지조차 남지 않은 거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습니다. 제가 나설 차례입니다. "김철수 씨, 오늘 영업 종료합니다.""
금요일 오후 4시. 직장인에게 이 시간은 '마의 구간'이다.
주말의 단꿈이 코앞인데,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는 에베레스트 산처럼 쌓여있는 시간.
오늘 김철수 대리의 상태는 심상치 않다. 지난 월요일부터 축적된 피로(1화), 박 부장에게 걷어차인 자존심(2화), SNS를 보며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3화)이 그의 내면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발밑에서 그 위태로운 징후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평소라면 그의 발밑에 얌전히 칠해져 있어야 할 내 몸이, 오늘은 제멋대로 부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끓는 기름처럼. 나의 농도는 짙다 못해 끈적거리는 타르(tar) 같았고, 무게는 납덩이 수십 개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김철수가 한 발짝 떼기가 힘든 건, 단순한 피로 때문이 아니라 내 몸집이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김 대리, 아까 말한 그 보고서, 아직 멀었나? 5시까지 임원 회의 들어가야 하는데!" 박 부장의 호통이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저 인간은 목청도 좋다.
평소의 김철수라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왔을 "넵!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 저... 그게..."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뇌 속에서 톱니바퀴가 뻑뻑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가 잔뜩 낀 기어처럼, 끼이익, 끼이익 거리는 불길한 금속성 마찰음.
그는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했다. 엑셀 파일의 수많은 숫자가 개미 떼처럼 보인다고 했다. 글자가 해독되지 않는 난독 증세. 식은땀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있는 나에게까지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안 돼, 철수야. 정신 차려. 지금 무너지면 끝장이야. 박 부장이 너를 잡아먹을 거라고!' 그의 이성(페르소나)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의 배터리는 이미 방전 상태. 0%. Warning. System Shutdown Imminent.
그 순간이었다. 김철수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이명(耳鳴)이 삐- 하고 들려왔다. 소위 말하는 '번아웃(Burnout)'이 강림한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서 로그아웃해 버린 상태.
주인의 통제력이 사라진 순간, 그것은 우리 그림자들에게는 해방의 신호탄과 같다. 그동안 나를 억누르던 주인의 의지, 사회적 체면, 두려움이라는 족쇄가 풀린 것이다.
'지금이다.'
나는 더 이상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책상 밑 어둠 속에서, 김철수의 다리를 타고, 허리를 감싸고, 그의 어깨 위로 솟아올랐다. 지금 이 순간 사무실에서 가장 거대하고 존재감 있는 것은 바로 나, '쉐도우'였다. 물론 빛의 세계에 사는 저 멍청한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김철수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박 부장은 여전히 닦달하고 있었다. "아니, 사람 말을 뭘로 듣는 거야? 김 대리! 김철수!"
박 부장이 김철수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 충격에 김철수의 껍데기가 휘청거렸다. 그 꼴을 보니 내 안의 무언가가 폭발했다. 감히 내 숙주를 건드려?
나는 주도권을 잡기로 했다. 로그아웃된 김철수 대신, 내가 임시 관리자 권한을 획득했다. 그림자가 주인의 몸을 통제하는 건 금기시된 일이지만, 비상사태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시커먼 그림자 손을 뻗어 김철수의 오른손을 덮었다. 그리고 나의 의지대로 그의 손을 움직였다. 김철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손이 마우스를 잡았다.
'저장? 아니, 필요 없어.'
내 의지에 따라 김철수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우스 커서가 엑셀 창의 오른쪽 상단, 빨간색 'X' 표식으로 향했다. [작성 중인 문서를 저장하시겠습니까?] 라는 팝업창이 떴다.
나는 주저 없이 김철수의 검지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아니요(N)' 클릭.
"어...?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박 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모니터 화면 속의 수많은 데이터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증발했다. 며칠 밤을 새워 만든 보고서가, 박 부장의 야망이, 김철수의 고통이, 클릭 한 번으로 사라졌다.
정적.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김철수에게 꽂혔다.
하지만 나의 폭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김철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삐그덕거리는 관절 인형을 조종하듯, 나는 그의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김철수는 멍하니 서 있는 박 부장을 지나쳤다.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박 부장의 그림자 '멍텅구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김철수를 이끌고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누군가 "김 대리, 어디 가?"라고 물었지만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빌려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목을 조르던 목줄이 풀리자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비상구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쾅! 1층 로비 문을 박차고 나가자,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그 강렬한 빛 아래서, 나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김철수의 발밑에 짙고 선명하게 드리워진 검은 형상으로.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나는 더 이상 눌려있지 않다. 나는 당당하게 그를 지탱하고 있다.
김철수는 회사 앞 화단 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망했다..." 그의 입에서 탄식처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그의 발밑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임마. 안 망했어. 네가 망가지는 것보단 보고서가 망가지는 게 나아. 내가 강제 종료 안 시켰으면 너는 오늘 뇌혈관이 터졌을지도 몰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허공에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가 파란 하늘로 흩어졌다.
그의 내면에서 폭풍우가 지나가고, 묘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것은 체념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까 같은 불안과 공포는 아니었다.
나는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의 그림자로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의 곁에 머물렀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내 몸은 점점 길어졌다. 나는 길어진 내 팔로 그의 지친 어깨를 감싸 안는 시늉을 했다.
수고했어, 오늘도. 이제 좀 쉬자. 너도, 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