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5화) 에필로그 - 그림자와 왈츠를 (Dancing with Shadow)
토요일 오후. 세상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김철수의 속은 숯검정이 되었다. 어제 저지른 '보고서 증발 사건'의 후폭풍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핸드폰은 꺼둔 지 오래다. 부재중 전화 알림이 수십 개는 와 있을 게 뻔했다.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도착한 곳은 한강 공원. 주말을 즐기는 행복한 사람들 틈에서 그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는 강변 벤치에 구겨진 종이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 중 빛과 어둠의 경계가 가장 모호해지는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이 시간이 되면 우리 그림자들은 가장 길어진다.
나는 그의 발밑에서 기지개를 켰다. 어제의 '거사' 이후 나는 부쩍 힘이 세졌다. 김철수도 나를 느낀 듯,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발끝에서 시작해 저 멀리 강물까지 길게 뻗어 나간 나, '쉐도우'에게 머물렀다.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낸 건 아니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야. 너 거기 있지?)'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발목을 살짝 조였다. '그래, 임마. 여기 있다.'
'(어제는... 고마웠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정말 미쳐버렸을 거야.)'
놀라운 변화였다. 그동안 나를 성가신 존재, 감추고 싶은 치부로만 여기던 그가 나에게 감사를 표하다니. 나는 조금 으쓱해져서 몸집을 부풀렸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김철수, 나는 네 적이 아니야. 나는 네가 외면했던 감정들의 집합체이자, 네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잘라내 버린 너의 반쪽이라고.'
김철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강물에 비친 윤슬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커먼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랐다. 두려움이나 혐오가 아닌, 어떤 깊은 이해와 연민이 담긴 눈빛이었다.
"미안하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나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그동안 스스로를 혹사시켜온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들 비위 맞추느라 정작 내 안에 있는 너는 돌보지 못했어. 네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나는 귀를 막고 있었지. 무거워서 미안해. 어두워서 미안해."
그의 사과에 내 몸을 이루고 있던 끈적하고 시커먼 감정의 응어리들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인정하는 것.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공원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빛의 방향이 바뀌자 내 위치도 바뀌었다. 나는 이제 그의 뒤가 아니라,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김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왈츠의 기본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도 그의 스텝에 맞춰 움직였다. 그가 왼쪽으로 가면 나도 왼쪽으로, 그가 돌면 나도 돌았다.
우리는 춤을 추었다. 빛(페르소나)이 리드하면 어둠(그림자)이 따라가고, 때로는 어둠이 리드하면 빛이 따라갔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잡아끄는 족쇄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완성하는 파트너였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입체적이라는 증거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 아니 둘이서 춤을 추던 김철수가 멈춰 섰다. 땀방울이 맺힌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진짜 미소가 번졌다. 가식적인 '사회생활용 미소'가 아닌,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편안한 미소였다.
"가자, 파트너. 월요일이 오면 또 전쟁터겠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그는 꺼뒀던 핸드폰을 켰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폭탄이 쏟아졌다. 박 부장의 분노 섞인 카톡도 보였다. 하지만 김철수는 더 이상 쫄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이제 든든한 지원군, '각성한 쉐도우'가 있으니까.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의 발밑에서 나 역시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따라갔다.
우리의 2인 3각, 아니 '1인 2역'의 인생 드라마는 이제 막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 앞으로도 수많은 시련과 좌절이 있겠지만, 우리는 함께 춤추며 나아갈 것이다.
때로는 삐걱거리고 발을 밟을지라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김철수의 그림자, 쉐도우. 그리고 김철수는 나의 빛, 나의 주인. 우리는 둘이 합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