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5화) 다시 털실 뭉치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30년 묵은 털실의 기억이 풀려나와 새로운 생명을 감싸는 순간, 나는 비로소 '영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서랍 속의 긴 잠, 그리고 나프탈렌의 추억
시간은 잔인하리만치 정직하게 흘렀다.
우리 주인 철수는 더 이상 산동네 비탈길에서 연탄 지게를 지던 까까머리 중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으며, 곧 아빠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나와 내 반쪽 '왼손이'는 어디에 있었냐고?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철수네 가족이 산동네를 떠나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우리는 '버리기엔 아깝고 쓰기엔 낡은' 물건들로 분류되어 자개장롱 깊숙한 곳, 오동나무 상자 안에 봉인되었다.
우리의 룸메이트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나프탈렌 두 알과, 철수의 빛바랜 중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형, 나 좀이 슨 것 같아. 옆구리가 간지러워.’ 옆에 포개져 있던 왼손이가 투덜거렸다. ‘참아. 우린 이제 은퇴한 몸이야. 여기서 조용히 삭아가는 게 우리의 마지막 임무라고.’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털실 조직을 느끼며 체념했다. 한때는 뜨거운 콧물을 받아내고, 빙판길을 구르며 주인의 손을 지켰던 '현역'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박제된 존재였다. 내 엄지 부분에 덧대진 투박한 초록색 땜빵 자국만이 그 치열했던 시절의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가끔 장롱 문이 열릴 때마다 빛이 들어왔지만, 우리를 찾는 손길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잊혀진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30년 만의 외출, 너무 늙어버린 우리
그러던 어느 봄날, 따스한 햇살과 함께 기적이 일어났다. 끼이익. 오동나무 상자 뚜껑이 열렸다.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나프탈렌 냄새에 절어 있던 우리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이고, 이게 아직 여기 있었네."
그 목소리. 30년 전 백열등 밑에서 밤새 나를 뜨던 바로 그 '조물주', 철수 엄마였다. 아니, 이제는 '철수 할머니'가 된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은 예전보다 더 거칠고, 마디는 굵어졌으며,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떨리는 손길이 우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어머니, 그거 아직도 안 버리셨어요? 곰팡이 슬었겠네." 장성한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가장의 무게가 느껴졌다.
"버리긴 왜 버려. 실이 얼마나 짱짱한데."
할머니는 우리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30년 만에 쐬는 바깥공기였다. 그녀는 우리를 탁탁 털었다. 먼지와 함께 묵은 세월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햇살 아래 드러난 내 몰골을 보고 경악했다. 붉었던 색은 바래서 분홍색에 가까워졌고, 곳곳에 좀벌레가 파먹은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손목 고무단은 탄력을 잃어 늘어난 팬티 고무줄처럼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명백한 '사망 선고'였다. 우리는 더 이상 장갑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철수는커녕, 철수의 아이에게 물려주기에도 민망한 상태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쓰레기통으로 가는 일만 남았어.' 나는 왼손이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준비했다.
위대한 해체 쇼: 죽음이 아닌 변신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우리를 버리는 대신, 다시 안방 아랫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돋보기를 끼고 내 손목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 보자... 매듭이 어디더라..."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것은 바늘이 아니라 작은 가위였다. 그녀는 30년 전 자신이 마무리했던 마지막 매듭을 찾아 조심스럽게 끊어냈다.
스르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할머니가 실 끝을 잡고 당기자, 벙어리장갑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내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엄마, 나 없어져요! 나 사라진다고요!’
나는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물론 들리지 않았겠지만). 코와 코가 분리되었다. 촘촘하게 엮여 있던 조직들이 해체되었다. 철수의 손을 감싸던 손등이, 콧물을 닦아주던 손바닥이, 그리고 그 투박했던 초록색 엄지손가락 땜빵이 모두 한 올의 긴 실로 돌아갔다.
그것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30년간 웅크리고 있던 몸을 기지개 켜는 듯한, 기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꼬불꼬불하게 라면처럼 변해버린 붉은 실들이 바닥에 쌓여갔다.
나와 왼손이는 형체를 잃었다. 우리는 더 이상 '오른쪽'도 '왼쪽'도 아니었다. 그저 '붉은 털실 더미'가 되었다.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환원(還元)'되고 있었다. 태초의 모습으로.
다시, 사랑을 뜨다
할머니는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털실들을 찜통에 넣고 뜨거운 김을 쐬어 주었다. 쭈글쭈글했던 주름이 펴지듯, 우리의 낡은 털실이 다시 보송보송하게 살아났다. 비록 색은 바랬지만, 그 안에는 지난 30년간 철수 가족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았던 체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펴진 실을 다시 동그랗게 말아 털실 뭉치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대바늘을 잡았다.
"우리 손주, 태어나면 발 시리지 말라고 덧신이나 떠야겠다."
30년 전, 철수를 위해 밤을 새웠던 그 손으로, 할머니는 이제 철수의 아이를 위한 뜨개질을 시작했다.
틱, 틱, 틱.
익숙한 쇠바늘 소리가 들렸다. 붉은색 실과, 아까 풀어낸 초록색 실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다시 춤을 췄다. 이번에는 투박한 벙어리장갑이 아니었다. 아주 작고 앙증맞은 아기 덧신이었다.
나는, 아니 '우리'였던 털실은 희열을 느꼈다. 내 몸의 일부는 아기의 발뒤꿈치를 감싸는 부분이 되었고, 철수의 상처를 덮었던 초록색 털실은 덧신의 예쁜 꽃장식 무늬가 되었다.
아버지를 감싸던 나의 온기가, 이제 곧 태어날 새로운 생명의 첫발을 따뜻하게 감싸줄 것이다. 모양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엄마의 사랑은, 털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아들에게서 손주에게로,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서랍 속에서 늙어 죽지 않았다. 나는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의 생각!
"사랑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낡고 해져서 사라집니다. 우리가 아끼던 물건도, 때로는 우리의 육체도 말이죠.
하지만 그 안에 깃든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80년대 어머니가 밤새 떠준 장갑 속의 사랑은, 모양을 바꿔 2020년대 손주의 덧신이 되었습니다. 털실은 낡았지만, 그 안에 담긴 염원은 여전히 새것처럼 뜨겁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준 사랑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당장은 그 형태가 보이지 않거나 낡아버린 것 같아도, 그 에너지는 어딘가에서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세상을 데우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세요. 당신의 사랑은 그 어떤 물질보다 질기고, 영원히 순환할 테니까요.
( 에필로그 )
낡은 벙어리장갑의 긴 수다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가난했던 시절의 '궁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 붉고 투박한 털실 속에 담긴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뜨거운 헌신과 가족애를 다시 한번 꺼내어 햇볕에 말려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옷장 깊숙한 곳에서, 혹은 기억 속에도 낡은 털장갑 하나쯤은 들어있지 않으신가요? 오늘 밤엔 잠시 그 기억을 꺼내어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데워줄 가장 강력한 난로가 될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