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의 고백: 5미터의 철학(1~5화) - (3화) 중력을 거스르는 유일한 존재들

안녕하세요? '독거놀인'입니다.

(3화) 키 재는 날: 성장의 기쁨과 슬픔 

"인간은 늙으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만, 자라는 것들은 하늘을 향해 목을 뺀다."


저녁 식사 후 나른함이 감도는 시간. 나의 주인 김씨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리모컨으로 의미 없는 채널 좀비 놀이를 하고 있다. 나는 공구함 속에서 아까 이케아 소파를 재다가 삐끗한 허리(금속판)를 주무르며 쉬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뱃살은 늘어나고, 공간 지각 능력은 퇴화하는 중년 남자와의 동거란... 피곤하다.

쾅!

현관문이 열리고, 집안의 공기가 바뀐다. 에너자이저, 7살 난 꼬마 주인 '민준'이 등장했다.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집어던지고(저 안에 뭐가 들었길래 저렇게 무거운 소리가 날까?) 아빠에게 달려든다.

"아빠! 나 오늘 유치원에서 우유 두 개나 먹었어! 빨리 키 재줘! 빨리!"

아, 올 것이 왔다. 나의 하루 중 유일한 '공식 행사'. 아침의 뱃살 측정은 '사기극'이고, 오후의 가구 측정은 '재난 영화'였다면, 저녁의 키 측정은 일종의 '종교 의식'과 같다.

김씨가 끙끙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그래, 그래. 우리 아들 얼마나 컸나 볼까?" 그는 서랍에서 나를 꺼낸다. 그의 손길이 아침과는 다르다. 아침에는 나를 무슨 혐오스러운 지방 덩어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워했다면, 지금은 성스러운 유물을 다루듯 경건하다.

우리는 거실 한쪽 벽, '성장의 벽'으로 이동한다. 그곳엔 민준이의 역사가 연필 자국으로 빼곡히 새겨져 있다.

"자, 뒤꿈치 붙이고, 턱 당기고, 차렷!"

아이가 벽에 붙어 선다. 자, 이제 나의 쇼타임이다. 나는 이 순간을 사랑한다. 바닥에 발을(케이스 하단을) 단단히 디디고,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비상하는 이 순간!

슈우우욱-

나는 중력을 비웃으며 위로 뻗어나간다. 이것이 바로 줄자의 자존심, '직립(Stand-out)' 기술이다. 2미터까지 꺾이지 않고 꼿꼿하게 설 수 있는 나의 척추기립근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흐물흐물한 옷감 줄자 따위는 흉내도 못 낼 위엄이지.

나는 아이의 키를 향해 올라가며 생각한다.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다. 

주인 김씨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키가 줄어든다. 중력이 그의 척추 뼈 사이사이를 짓눌러 수분을 짜내고, 결국엔 땅바닥과 가까워지게 만든다. 그의 성장은 멈춘 지 오래고, 이제 남은 건 '퇴화'와 '중력 순응' 뿐이다.

하지만 이 작은 생명체는 다르다. 녀석은 중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매일매일 하늘을 향해 맹렬히 솟구친다. 내가 가진 5미터의 눈금 중, 가장 생동감 넘치는 구간이 바로 여기다.

내 머리(걸쇠)가 아이의 정수리에 닿았다.

'어라?'

나는 순간 멈칫했다. 따뜻하고 말랑한 정수리의 느낌,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땀 냄새와 베이비 파우더 향.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내 감각 기관(걸쇠 끝부분)이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나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꼬마 녀석,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다. '까치발' 기술 시전 중이다. 중력을 거스르다 못해 아예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 너도 120cm 클럽에 빨리 가입하고 싶겠지. 우유 두 팩의 효능을 즉각적으로 증명하고 싶을 테고.

나는 김씨의 반응을 살폈다. 아침에 자신의 뱃살 36인치를 34인치로 우기던 그 매의 눈이라면, 이 정도 속임수는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웃고 있다.

그는 아이의 떨리는 종아리 근육과 살짝 들린 발뒤꿈치를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성애 필터'는 아침의 '욕망 필터'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는 아이의 귀여운 사기극을 기꺼이 묵인한다.

"와! 대박! 민준아, 너 지난달보다 무려 1.5센티나 컸어! 118.5센티야!"

아니, 아빠 양반. 117센티잖아요. 까치발 내려놓으면 117이라고요.

"우와! 진짜? 나 진짜 많이 컸다! 아빠, 나 이제 형아지?"

아이는 방방 뛰며 기뻐한다. 김씨는 벽에 새로운 눈금을 긋고 날짜를 적는다. '202X.X.X 민준이 (까치발 살짝)'이라고 작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내 몸을 감으며(retract) 생각에 잠긴다. 아침의 거짓말은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었지만, 저녁의 거짓말은 아이의 꿈을 키워주기 위한 따뜻한 응원이었다.

내 몸에 닿았던 그 따뜻한 정수리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다. 그건 단순히 키가 자란다는 생물학적 신호가 아니다. 아이가 오늘 하루 세상과 부딪히며 배운 것들, 먹었던 음식들, 그리고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응축된 에너지 덩어리다.

나는 다시 차가운 서랍 속으로 들어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 비록 김씨의 뱃살은 늘고 키는 줄어들겠지만, 그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저 아이는 계속해서 나의 더 높은 눈금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 꼬마야. 더 쑥쑥 커라. 내 몸은 5미터나 되니까, 네가 거인국 잭이 되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간대도 다 재줄 수 있어. 까치발 좀 들면 어때? 하늘에 더 가까워지고 싶은 그 마음도, 다 자라는 과정인걸."

오늘 나의 하루는 차가웠다가, 뜨거웠다가, 마지막엔 따뜻하게 저물어간다. 꽤 괜찮은 하루였다.



나의 생각!

성장은 숫자로 명확하게 증명되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키를 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드는 저 까치발, 그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이미 성장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어른이 된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인 키는 자라지 않습니다. 때로는 중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의 키, 영혼의 넓이는 여전히 자랄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제보다 조금 더 이해심이 깊어졌나요? 조금 더 인내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성장한 것입니다. 비록 아무도 눈금으로 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내면은 분명 1센티미터 더 하늘과 가까워졌을 테니까요. 까치발을 들어서라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는 당신의 그 마음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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