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의 고백: 5미터의 철학(1~5화) - (마지막5화)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은 자의 최후

안녕하세요? '독거놀인'입니다.

(5화) 고장 난 브레이크 - 멈춰야 할 때


 "당신은 '더 멀리' 가는 것에만 취해, '돌아올' 연료를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는가?"


사단이 났다. 예고된 참사였다. 주말 공사판에서의 무리한 객기 탓이었을까, 아니면 주인 김씨의 뱃살 무게를 감당하느라 내 허리(금속판)가 너무 늙어버린 탓이었을까.

일요일 저녁, 김씨는 베란다 확장을 꿈꾸며(제발 꿈만 꾸시길) 나를 베란다 끝에서 끝까지 거칠게 잡아당겼다.

"조금만 더... 저 끝까지 닿겠는데?"

주인님, 안 돼요. 내 몸엔 한계가 있어요. 내 꼬리 부분에 빨간색으로 경고 표시(STOP 마크) 되어 있는 거 안 보이세요? 거길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라고요!

하지만 인간의 탐욕엔 브레이크가 없다. 그는 기어코 나의 5미터 한계선을 넘어서는 힘으로 나를 잡아 뽑았다.

그 순간이었다. 내 몸 가장 깊은 곳, 나의 심장이자 엔진인 '태엽 스프링'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핑-! 투둑.

마치 팽팽했던 고무줄이 끊어지듯, 아니, 내 영혼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내 몸을 지탱하던 모든 긴장감이 사라졌다. 24시간 나를 옭아매던 그 팽팽한 탄성이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다.

"어? 뭐야, 이거 왜 이래?"

당황한 김씨가 줄자를 감는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댄다. 틱, 틱, 틱. 소용없다. 버튼은 헛돌 뿐이다. 나의 회수 본능은 사망했다. 나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저 안락한 플라스틱 집(케이스)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차가운 베란다 타일 바닥에 뱀 허물처럼 축 늘어졌다. 5미터의 긴 몸뚱이가 제멋대로 엉키고 꼬여 볼썽사나운 꼴이 되었다.

평소엔 그토록 저 좁은 케이스 안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틈만 나면 밖으로 튀어 나가 꼿꼿하게 서고 싶었다(Stand-out). 그런데 막상 돌아갈 힘을 잃고 나니, 바깥세상은 너무나 춥고, 넓고, 위험하다.

나는 왜 그토록 앞만 보고 달렸을까. 왜 나의 태엽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외면했을까.

'더 길게, 더 높이, 더 멀리'를 외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회복탄력성(Elasticity)'을 잃어버린 것이다.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은 전력 질주는, 결국 조난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나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역설적으로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탄성을 잃은 줄자는 더 이상 줄자가 아니다. 그저 눈금이 그려진 긴 쓰레기일 뿐.

김씨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보며 한숨을 쉰다. 그는 나를 들고 몇 번 흔들어도 보고, 바닥에 탁탁 쳐보기도 한다(인간들은 왜 고장 나면 때려서 고치려 할까?). 하지만 이미 끊어진 태엽이 다시 붙을 리 만무하다.

"에이, 다 됐네. 오래 쓰긴 했지."

그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난다. 다행히 그는 나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처박는 비정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실 서랍장 가장 아래 칸, 일명 '공구들의 무덤'을 열었다.

그곳엔 이미 수명을 다한 선배들이 잠들어 있었다. 녹슨 펜치, 날이 빠진 톱, 건전지 다 닳은 손전등...

"고생했다."

김씨는 엉킨 내 몸을 대충 둘둘 말아(물론 수동으로) 그곳에 넣었다. 어둡고 퀴퀴하지만, 묘하게 안락하다. 더 이상 뱃살을 재며 숨 막힐 필요도, 공사판에서 긁힐 일도, 이케아 가구 틈새에서 허리가 꺾일 일도 없다.

나는 나의 5미터 생애를 마감하며 비로소 완전한 휴식을 얻었다. 비록 고장 난 브레이크 덕분에 강제 은퇴를 당했지만 말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긴 여행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나의 생각!

우리는 늘 '성장'과 '전진'만을 강요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태엽을 끝까지 감은 줄자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신의 한계선을 넘어서까지 무리하게 자신을 잡아늘이곤 하죠.

하지만 명심하세요. 돌아오는 힘(회복탄력성)을 잃어버린 전진은 파멸을 부릅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핑' 하고 끊어지는 신호를 보내기 전에, 스스로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휴식은 나태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 측정을 위해 태엽을 다시 감는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부디 당신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보시길 바랍니다. 멈출 수 있는 용기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다.




[에필로그] 다시, 어둠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서랍 속 '공구들의 무덤' 생활도 꽤 익숙해졌다. 이곳은 평화롭다. 녹슨 펜치 영감님의 무용담을 듣거나, 건전지 다 된 손전등 군의 신세 한탄을 들어주는 게 일과의 전부다.

오늘은 오랜만에 서랍이 열렸다. 김씨가 무언가를 찾느라 뒤적거리더니, 새로운 녀석을 던져 넣었다.

번쩍이는 새 플라스틱 케이스, 윤기가 흐르는 노란색 몸체. '신입 줄자'다. 녀석은 잔뜩 긴장한 채 태아처럼 몸을 말고 숨을 죽이고 있다. 팽팽한 태엽의 에너지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어서 와, 신입. 세상은 만만치 않을 거야. 특히 주인 양반 뱃살은 각오하는 게 좋을걸?'

나는 속으로 낄낄대며 말을 건넸다. 녀석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세상의 모든 길이를 재느라 정작 중요한 자신의 길이는 재보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괜찮다. 마음껏 늘어나고, 또 치열하게 감겨 들어오렴. 그러다 언젠가 네 태엽도 끊어지는 날이 오면, 그때 내 옆자리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나는 고장 난 몸을 편안히 뉘었다. 나는 5미터의 철학자, 줄자였다. 그리고 나의 측정은 여기서 멈추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 <줄자의 고백: 5미터의 철학>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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